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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Feb 17. 2019

우리 모두 '나쁜' 페미니스트라도 되자!

[책 리뷰] 나쁜 페미니스트 (2014/2016)

나는 아주 모순덩어리의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위 말하는 '난 사람'이 아니라면 다 그렇지  않겠나 싶다. 자유롭고 싶다고 하면서도 어딘가 소속되지 못하면 외롭고 불안해하고, 늘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전문가 대접받아보고 싶어 하고, 인종차별은 나쁘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oo나라 사람들은'이란 말을 해버리고, 쿨 해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엄청 찌질하고,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가끔은 나도 놀랄 만큼 전형적인/폭력적인 남성성을 지니고 있고, 짐짓 침착한 척  하지만 사실 분노를 삶의 주요 원동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뭐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부끄러우니까 말하지 않겠다.


나는 아름다운 핑크색 표지를 가지고 있는 록산 게이(Roxane Gay)의 '나쁜 페미니스트'가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쁜'과 '페미니스트'이다.



아이티계 미국인 여성, 다르게 표현하자면 흑인 여성인 록산 게이가 이야기하는 '자신의 페미니즘'은 아주 힘 있고,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쉽다. 아니 어쩌면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록산 게이는 개인적 경험, 쇼 프로그램, 영화, 다른 이들의 사례 등을 넘나들며 아주 맛깔난 글을 써냈다. 그러면서도 다른 페미니즘 서적만큼 또 복잡하기도 하고(특히 레이시즘과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부분이 좀 어려웠다), 록산 게이 스스로도 인정하듯, 이 책이 '진리의 책'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페미니즘 입문서로 남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쁜'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쁜(bad)'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좀 별로'라는 의미나, '불완전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서문부터 록산 게이는 나 같은 모순/엉망 인간이자 '한(국)남(자)'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어떻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아주 훌륭한 조언을 준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단점과 모순으로 똘똘 뭉친 보통의 인간이니까. (중략)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핑크색을 좋아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있을 뿐이다.


이 문장은 남성이자 엉망 인간인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쁜 페미니스트' 대신 '나쁜 실천가', '나쁜 아프리카니스트', '나쁜 연구자' 등등 여러 가지 단어를 대입하고 그 단어들에 모순되는 특징들을 나열해 보며,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에게 솔직하면서도 내가 믿는 것들에 대해서 지지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유달스러운 인간이 되거나, 외로운 투사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야기해주었다.


책의 저자 프로필에 실려있던 록산 게이의 사진. 내가 본 저자 프로필 사진 중 가장 멋있는 사진이다.


사실 우리네 삶이 타협의 연속이란 건 내가 기억하는 한 평생 동안 배워온 것이었고, 정작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요!"라고 외친 록산 게이도 그렇게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과 이상과 타인들이 세워 놓은 기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보통 인간으로서는 최선'이 무엇인지 멋진 문장으로 옮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항상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보통 인간들이 수많은 자기모순 속에서도 각자의 페미니즘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각자의 신념을 실천하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네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고, 덜 외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연대하고 싶지만, 나에게 페미니스트(혹은 다른 무언가)라는 호칭은 너무 과분하지 않을까?' 등등과 같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그 특권을 더 큰 사회적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고, 특권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권리를 박탈당하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284-285)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들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다 털어놓고 싶다. (375)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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