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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Apr 19. 2020

오랜만이에요 김지은님

[책 리뷰]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2020)

교보문고에서 '김지은입니다'라는 담담한 여섯 글자가 적힌 책을 보니 무엇보다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 김지은님이 계속하고 계시는구나'


김지은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pp.383.


얼마 전 선거 결과를 놓고 뉴스에서 중노년 남성들로만 이뤄진 '대권 잠룡'들의 행보가 이러니 저러니 떠드는 내용을 듣는데,  2018년 김지은님이 안희정의 성폭력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안희정은 저 '잠룡' 중 가장 큰 게 되어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2017년 민주당 경선을 통해 '차차기 대선 주자'로 안희정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에게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018년 김지은님이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밝힌 이후엔 그 사건에 대해 크게 관심 두질 않았다.


미투 직후부터 김지은님께 가해진 수많은 2차 가해로 인해 이 사건의 본질인 안희정이 권력과 힘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가려지고, 수많은 거짓 정보와 사건과 무관한 김지은님의 사생활, 범죄자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내놓는 망상들이 범람했다. 너무 알고 싶지 않은 거짓과 정보가 많아 그냥 다 멀리해버렸다. 더러운 공작 속에서도 김지은님이 힘겹게 힘겹게 세상에 내놓는 메시지를 읽었어야 했는데, '진흙탕 싸움 쳐다보기도 싫다'는 마음으로 외면했다.  


김지은님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투했고, 미투 이후에도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살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이 책에는  미투와 재판, 그리고 김지은님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안희정 무리가 김지은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날조한 이야기가 아닌, 진짜 김지은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심이 감사했고 늦게서야 생각하게  됨이 미안했다.


이 책은 어제저녁에 사서 어제 반 정도 읽었다. 안희정이 미투를 지지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기 바로 전  주, 안희정은 김지은님을 급한 일이 있다며 부른 뒤 김지은님께 "제가 감히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라는 말을 듣고서 네 번째  성폭행을 했다. 이후 김지은님은 마침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을 만났고, 죽더라도 이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안희정의) 그 눈빛, 온몸을 훑는 느낌이 뭔지 알겠다"라고 말했던 그 후배가 성폭력의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방송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거대한 권력이 몸과 마음을 착취할 때 느꼈을 두려움과  외로움, 무기력함과 비참함을 글을 통해 아주 일부나마 간접적으로 접하는데도 마음이 마구 흔들리고 자꾸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남성  중심의 문화와 권력(안희정의 경우엔 큰 권력이었지만, 권력은 상대적이기에 그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니다)이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며, 나도 안희정이 될 수 있다는 게 두려웠다.


지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92명과 지은이의 친구들  112명이 모여 만든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것이 한 사람의 김지은만의 일일까?"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에 김지은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40%가 성폭력을 경험한다는데, 남성의 몇%가  성폭력을 가할까? 남성 모두가 가해자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당신이 나와 같은 남성이라면 '나도 그럴 수 있다' 혹은 '나도  그랬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날 새벽, 무슨 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하반신에 벌레가 한가득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깼고, 다시 잠을 청할 기분이 들지 않아 책을 마저 읽었다.


책 속에서는 김지은님이 안희정 무리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내적으로는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가며 생존해나간 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지은님은 동료와 함께 "살아서 증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록하고 말하고 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늦게나마 김지은님을 응원하고 연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사람들은  김지은님을 포함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피해 사실을 밝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가짜 미투'라며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하지만 온라인 성 착취("N번방")와 세계 6위 규모의 성매매 시장으로 드러나는, 강간문화가 만연한 한국에서 성폭행 피해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 그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다. 우리는 범죄자의 이야기와 서사가 아닌, 생존자들이 용기 내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김지은입니다>,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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