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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Nov 16. 2019

치누아 아체베와 상호보완성, 그리고 이야기의 균형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아버지, 치누아 아체베 (Chinua Achebe)

오늘은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생일이다. 그는 1930년 오늘, 11월 16일에 나이지리아 이보 민족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2013년 3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Wherever something stands, something else will stand beside it.
어디든 무언가 있으면, 그 옆에 다른 무언가 또 있을 것이다. - 치누아 아체베


위의 문장은 치누아 아체베가 인용하여 유명해진 이보 민족의 속담이다. 치누아 아체베는 이 속담의 의미를 "무엇이든 한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보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것은 없고, 좋은 것들조차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그들의 세계관은 이중적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보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용감한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겁쟁이들이 용감한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남는다."


그는 이러한 상호보완성, 이중성을 그의 저작과 삶의 중심 주제라고 말했고,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한 성직자들도 이에 반하는 한 가지 방식, 한 가지 진리, 한 가지 삶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과 분쟁을 겪게 되었다고 말했다. (출처: 1988년의 한 인터뷰 https://youtu.be/_FzVUXxqNdw)


이러한 아체베의 생각은 그의 첫 소설이자,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저작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에서도 잘 드러난다.


출처: Facebook / 'Chinua Achebe' 페이지


내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처음 만난 곳은 재밌게도 경기 외국어 고등학교였다. 2013년 말, 한국에 연수를 오신 탄자니아 선생님들의 통역 겸 친구 겸해서 일정에 동행을 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 일정 중 하나였던 경기외고 방문이 있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발견한 탄자니아 선생님들이 모두 기뻐했었다. 선생님들은 이 책은 탄자니아 학생들의 필독서라고 입을 모아 말했고, 그 계기로 나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참고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스와힐리어 제목은 <Hamkani si shwari tena>로, "분노는 다시 가라앉지 않는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스와힐리어 번역본. Photo: Twitter / @Nanjala1


이 소설은 주인공 오콩고의 영웅 서사이자 비극이다. 전통 방식으로 살아가던 우무오피아 마을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고 그 사회가 높은 것으로 치는 가치들을 가졌고, 그 가치들을 믿었던 전쟁영웅인 오콩고의 삶이 어떻게 시들어가고 서양문화와의 접촉 속에서 부서지는지를 그리고 있다.


다소 과격한 제목과는 달리 그의 소설은 담담했고, '무엇이든 한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그와 이보사람들의 말처럼 무엇보다도 균형감각이 뛰어났다. 전통문화를 덮어놓고 미화해서 독자를 민망하게 하지도 않고, 그들의 사회에 진출한 서구문화를 악으로 규정해 우리 감정을 흔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문화와 전통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삶'으로 그려지는 것도 인상 깊었다.


그의 작품을 문학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아프리카에 대해 글쓰기로 이해한다면, 그의 작품을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치누아 아체베는 작가로서, 아프리카인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했다.


그는 종전까지 서구인들에 의해 '검은 대륙', '빈곤의 대륙', '야만인들의 대륙'으로 그려졌던 아프리카 이야기(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조샙 콘라드 -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 있다)가 서구인들이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며, 이런 잘못된 관행은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서구의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필요 때문에 지속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균형(Balance of Stories)'이 중요하다며 지금까지의 세계는 승자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패자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이 권력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출처: Atlantic의 2013년 기사: https://www.theatlantic.com/entertainment/archive/2013/03/chinua-achebes-legacy-in-his-own-words/274297/)


개인적으로 제가 이번 세기에서 진심으로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이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데 기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의 균형'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다른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도 이야기들을 만드는 것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his is really what I personally wish this century to see—a balance of stories where every people will be able to contribute to a definition of themselves, where we are not victims of other people's accounts. This is not to say that nobody should write about anybody else-I think they should, but those that have been written about should also particiate in the making of these stories.


오늘날의 세계는 여전히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이 주어져있다. 그리고 간혹 기득권 이야기꾼들이 소외된 사람들, 상대적으로 더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풀어놓긴 하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일 것이다. 나도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언제나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무튼, 생일 축하합니다. 치누아 아체베.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제목 배경 그림 출처: Google의 2017년 아체베 탄신 87주년 기념 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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