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운가 불쌍한가
오늘도 줄을 선다.
차도위에서
승강장에서
식당앞에서
매표소앞에서
화장실앞에서
온 순서대로 선다.
거기에는 성별도, 재산도, 인종도, 개인 사정도 없다.
오로지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평등하게 선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의 선후를 기준으로
먼저 권리를 누릴 순서의 규칙을 정했다.
그 규칙을 내가 정한 일은 없다.
의견을 내거나 찬성표 반대표를 던져본 바 없다.
하지만 모두 군말없이 지키려고 한다.
다른 대안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혼자 안지킨다고 될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을 에는 1월의 아침 출근길,
서울로 향하는 급행버스에 타기 위해
서둘러 긴 줄 끝에 서 본 적이 있다.
입석이 금지되면서
버스에 태울 수 있는 승객 수는 한정되었고
예전처럼 몸을 어떻게든 구겨 넣고
계단 위에 위태롭게 선 채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12분 뒤 도착예정이라는 냉정한 알림글을 읽으며
이 버스에 못 타면 10여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텅 빈 버스가 온다면야 모를까
내 순서상 다음 버스, 그 다음 버스까지도
염두해 두고 있어야 했다.
초조해졌다. 좀 더 일찍 나올걸..
어느새 난 내 앞에 선 사람들이
괜히 밉게 보이는 못된 애가 되어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도 않고,
그저 앞 사람들이 야속하고 미웠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긴 줄 맨 앞사람에게 옮겨갔다.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정원이 가득찬 버스가 오지 않는 한
그가 이번 버스에 오를 가능성은
우리들 중 가장 높다.
나같은 뒷 사람들처럼
내 순서까지 올까 하는 안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그 이유로 그가 부러웠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곧 버스가 도착했고,
내 부러움을 사던 줄 첫번째 사람을 시작으로
언 몸의 제군들은 하나 둘씩
따뜻한 버스 안으로 경건하게 입장했다.
줄이 줄수록 버스의 묵직함이 겉으로도 느껴졌다.
내 마음은 닳아 가벼워졌다.
거짓말처럼
내 앞 사람을 삼킨 버스 안 기사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엔 1할의 안쓰러움과
9할의 단호함이 읽혀졌다.
초조한 마음에 성급하게 걸쳐 놓았던
계단 위 왼발을 머쓱하게 거두었다.
버스는 애가 타서 까매진 나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줄의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버스가 날 허용하지 않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경험을 한
가장 재수 없는 사람,
뒷통수를 내보이며
함께 기다려주던 앞사람을 떠나보낸 유일한 사람,
뒷 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따가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
그게 바로 줄 첫번째 사람의 자리였다.
나의 맨 앞줄 선배도 같은 심경이었을테다.
그는 현재 줄의 최우선순위였지만
이전 줄의 무리에서 이유도 모른채 열외된
비운의 순서이기도 하다.
눈에 익어버린
앞 사람의 머리스타일, 코트 색깔이며 소재까지
잔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뒷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새로 생긴 줄의 첫번째라는 안도감보다는
지나간 버스에 대한 억울함과 미련이 더 클 자리.
나는 선배의 자리에 서서 깊게 반성했다.
함께 추위에 떨며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긴 줄을 선 사람들.
잠시지만,
내 급한 마음에
그 분들의 존재감을 애써 낮추어 잡았다.
선배가 당한 치욕도 몰라주고
그가 선 자리만 우러러봤다.
내가 서 있는 맨 앞자리 땅바닥에,
잠시후면 나올 내 후임자에 건넬 말을 묻었다.
그리고 두 발로 꼭꼭 다졌다.
이걸로 네 소중한 하루를 망치지마
네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어느 줄에나 첫번째도 마지막도 있으니까
그 자리는 셀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내는 조합의 결과일뿐이니까
우리는 긴 줄에 속한 것에 안도한다.
짧은 줄보다 긴 줄에 보던 얼굴이 많고
세상에 나온 지도도 많다.
친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전한 긴 줄 끝에 서서도
늘 불안하다.
더 치열하다.
마음만 앞선다고
줄이 좀처럼 주는 것도 아니다.
긴줄에 서기로 했으면
지금 내가 있는 줄 안의 순서가
첫번째인지 마지막인지에 울고 웃지 말자.
영원한 줄은 없고 고정된 순서는 없기에.
합리적 차별감을 주는 직선의 줄은 머지 않아
합리적 평등을 실현하는
둥근 순환의 마법을 만들어내고
마법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