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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Feb 23. 2016

줄 첫번째 사람

부러운가 불쌍한가



오늘도 줄을 선다.


차도위에서

승강장에서

식당앞에서

매표소앞에서

화장실앞에서

온 순서대로 선다.


거기에는 성별도, 재산도, 인종도, 개인 사정도 없다.

오로지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평등하게 선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의 선후를 기준으로

먼저 권리를 누릴 순서의 규칙을 정했다.


그 규칙을 내가 정한 일은 없다.

의견을 내거나 찬성표 반대표를 던져본 바 없다.

하지만 모두 군말없이 지키려고 한다.

다른 대안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혼자 안지킨다고 될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을 에는 1월의 아침 출근길, 

서울로 향하는 급행버스에 타기 위해

서둘러 긴 줄 끝에 서 본 적이 있다.


입석이 금지되면서 

버스에 태울 수 있는 승객 수는 한정되었고

예전처럼 몸을 어떻게든 구겨 넣고 

계단 위에 위태롭게 선 채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12분 뒤 도착예정이라는 냉정한 알림글을 읽으며

이 버스에 못 타면 10여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텅 빈 버스가 온다면야 모를까 

내 순서상 다음 버스, 그 다음 버스까지도 

염두해 두고 있어야 했다.


초조해졌다. 좀 더 일찍 나올걸..

어느새 난 내 앞에 선 사람들이 

괜히 밉게 보이는 못된 애가 되어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도 않고,

그저 앞 사람들이 야속하고 미웠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긴 줄 맨 앞사람에게 옮겨갔다.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정원이 가득찬 버스가 오지 않는 한

그가 이번 버스에 오를 가능성은 

우리들 중 가장 높다.


나같은 뒷 사람들처럼 

내 순서까지 올까 하는 안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그 이유로 그가 부러웠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곧 버스가 도착했고,

내 부러움을 사던 줄 첫번째 사람을 시작으로

언 몸의 제군들은 하나 둘씩

따뜻한 버스 안으로 경건하게 입장했다.

줄이 줄수록 버스의 묵직함이 겉으로도 느껴졌다.

내 마음은 닳아 가벼워졌다.


거짓말처럼

내 앞 사람을 삼킨 버스 안 기사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엔 1할의 안쓰러움과 

9할의 단호함이 읽혀졌다.


초조한 마음에 성급하게 걸쳐 놓았던 

계단 위 왼발을 머쓱하게 거두었다.

버스는 애가 타서 까매진 나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줄의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버스가 날 허용하지 않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경험을 한 

가장 재수 없는 사람,


뒷통수를 내보이며 

함께 기다려주던 앞사람을 떠나보낸 유일한 사람,


뒷 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따가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


그게 바로 줄 첫번째 사람의 자리였다.


나의 맨 앞줄 선배도 같은 심경이었을테다.

그는 현재 줄의 최우선순위였지만

이전 줄의 무리에서 이유도 모른채 열외된 

비운의 순서이기도 하다.


눈에 익어버린 

앞 사람의 머리스타일, 코트 색깔이며 소재까지

잔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뒷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새로 생긴 줄의 첫번째라는 안도감보다는

지나간 버스에 대한 억울함과 미련이 더 클 자리.


나는 선배의 자리에 서서 깊게 반성했다.


함께 추위에 떨며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긴 줄을 선 사람들.


잠시지만, 

내 급한 마음에 

그 분들의 존재감을 애써 낮추어 잡았다.

선배가 당한 치욕도 몰라주고 

그가 선 자리만 우러러봤다.


내가 서 있는 맨 앞자리 땅바닥에,

잠시후면 나올 내 후임자에 건넬 말을 묻었다.

그리고 두 발로 꼭꼭 다졌다.


이걸로 네 소중한 하루를 망치지마

네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어느 줄에나 첫번째도 마지막도 있으니까

그 자리는 셀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내는 조합의 결과일뿐이니까




우리는 긴 줄에 속한 것에 안도한다.

짧은 줄보다 긴 줄에 보던 얼굴이 많고

세상에 나온 지도도 많다.

친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전한 긴 줄 끝에 서서도 

늘 불안하다. 

더 치열하다.

 

마음만 앞선다고 

줄이 좀처럼 주는 것도 아니다.


긴줄에 서기로 했으면

지금 내가 있는 줄 안의 순서가

첫번째인지 마지막인지에 울고 웃지 말자.

영원한 줄은 없고 고정된 순서는 없기에.


합리적 차별감을 주는 직선의 줄은 머지 않아 

합리적 평등을 실현하는 

둥근 순환의 마법을 만들어내고

마법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줄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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