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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조의 호소 Sep 27. 2015

검은 염색약

머리카락이 파뿌리 되어서도

마트 가서
검은 염색약 좀 사와라.
쓰던 걸로.


아빠의 심부름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빠엄마를 볼 때마다 자꾸만

하나 둘

하얗게 센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기던 참이었다.


당신 딴에는

지난 해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것이

추석을 맞는 방법이었나 보다.


염색약 상자들이 빼곡히 서 있는 진열대 앞.

나는 망설임 없이

아빠가 고집하시는 제품을 집어 들었다.

₩15,000원

집에서 쓰는 염색약 치고

그리 싼 금액은 아니었지만

이 돈이면 젊음을 살 수 있다 생각하니

아까울 것도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내게

염색을 해달라 하셨다.

나는 흔쾌히 응하면서

염색약 통을 세차게 흔들어 거품을 냈다.

그리고 그것을

아빠 구레나룻부터 차곡차곡 펴 바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성공한 이력이 있어

딱히 긴장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내 경솔한 빗질은

아빠의 이마와 뒷덜미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여 버렸고,

딸의 손길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빠의 눈빛은 이내 절망과 노기 어린 눈초리로 바뀌어만 갔다.

눈치 없는 나는

염색약을 뒤집어 쓴 아빠를 보고

짱구 닮았다며 킥킥대다

뒤늦게 상황파악이 돼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다.

짜증을 내도 좋고

새하얀 머리라도 좋으니

이렇게 평생 머물러 줬음 좋겠다.


이렇게 매년

오늘의 굴욕을 만회할 다음 추석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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