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조의 호소 Jan 20. 2016

증명

인생도 수학처럼 딱 떨어졌으면

동생을 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동생을 대신해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춰 데리러 와 주시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두세 번의 통화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어색함이 든 건 기분 탓일까. 늘 그랬듯 엄마는 평소보다 두 톤 높은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동생의 귀국으로 시작한 대화주제는 내 안부 걱정으로 번졌다가 건강과 피부와 식습관의 상관관계를 거쳐 내 진로문제로까지 넘어왔다.

엄마는 ,

언제까지 그 돈 받으면서 거기 붙어 있을 거냐,

4년제 대학까지 나와서 알바만 할 거냐,

이제 그만 네가 원하는 쪽으로 직장을 구해라,

고 하셨다. 

그래도 최소한 '네가 원하는' 이라는 여지는 남겨 주셨다. 난 그게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아주 잘 안다. 내가 원하는 길이 '평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엄마이기에, 그래서 내게 '일반적인' 길을 강요할 수 없는 엄마이기에, 그 답답함을 십분 이해하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꾹꾹 누른 잔소리를 매듭지으며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엄마도 너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시기다." 반백년을 넘게 산 엄마도 나처럼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니. 뜻밖의 고백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 용기에 대한 존경과 강렬한 동지애가 피어났다. 남 밑에서 일 못하는 아빠의 성정 덕분에 평생 곁에서 사업파트너로 살아온 엄마였다. 엄마는 누구보다 '불안정의 불안함'을 잘 알 터였다. 그런 불행을 당신 자식에게는 대물림하기 싫었을 것이다. 엄마의 목소리는 어느새 한층 깊어져 '우리'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기쁘고

즐겁고

활기차고

보람되게

화이팅!


통화가 끝날 무렵의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다. 엄마가 손수 만든 우리집 구호. 처음에는 오그라들고 간지러워서 따라 하기도 싫었는데, 살다 보니 저만한 명구를 못 찾겠다. 즐겁고 기쁜 게 인생의 전부 아니던가? 울엄마 구호 하나는 참 잘 지었어.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갈아타는 칸칸마다 사람들로 붐빈다. 차창 너머로 시뻘겋게 충혈된 도시의 눈들이 빠르게 스쳐가는데, 그 속에서 낯익은 의구심이 일었다. 


이 길은 과연
우회로일까,
지름길일까.


누군가 '회피'라 비난한들 뭐가 중요한가? 끝점에 도달해서 이 길은 원래 이렇게 생긴 길이었노라고, 그러니 회피한 게 아니라 제대로 온 게 맞다고 떳떳하게 증명해 보이면 되는 것 아닌가? 지름길은 결국 내가 만드는 거다. 기쁘고, 즐겁고, 활기차고, 보람되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