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과 착한 아이 콤플렉스
‘나잇값’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이라는 뜻풀이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 단어가 언급될 때면 패키지로 ‘답게’라는 표현도 따라붙는다. 20대면 20대‘답게’, 30대면 30대‘답게’, 어린애‘답지’ 않게……. 마치 개목걸이처럼 둥글게 줄 쳐진 나이테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훈계적 잣대가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나잇값은 대개 성숙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제 연령대보다 깊은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이를 가리켜 ‘성숙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오류는 그 판단기준을 ‘나이’에 둔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스무 살의 두 친구가 있다고 치자. 한 명은 동생이 여럿 있는 맏이이고 다른 한 명은 외동일 경우, 자신보다 주변을 먼저 챙기는 게 익숙한 전자의 경우가 상대적으로 성숙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외동인 친구는 미성숙한 사람일까? 아니, 그런 사람으로 치부되는 게 옳은 걸까? 사람은 저마다의 성격이 있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다. 물리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성숙’과 ‘미성숙’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그 자체로 미성숙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숙하다는 건 과연 좋은 것일까? 스파이더맨의 삼촌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게, 모든 언행에는 책임이 따른다. 슬프게도 그 책임 안에는 사회적인 기대치도 포함된다. 내가 성숙하게 굴면 사람들은 내게 점점 더 강도 높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 번 성숙한 사람으로 굳어지면 그 이미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않는 이상 본전도 못 건질뿐더러,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군 사람보다도 더 큰 질책을 받게 된다. 비논리적이고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철없이 굴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심리를 역이용해 왔던 것이다.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않도록.
과거의 나는 본의 아니게 성숙한 편이었다. 사람들과 불편해지는 게 싫어 나보다 주변을 우선적으로 배려했고, 뭐든 참는 것도 잘했다. 그러다 보니 늘 희생당하는 건 나였다.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나’라는 표현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내가 반대표라도 드는 날엔 역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배신감 섞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만만해 보이면 무시하고 짓밟으려 드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사람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뜯어고치기로 했다.
‘불쌍해지느니 못되게 굴자.’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사람이 되자.’
결과는 의외였다. 이기적으로 굴면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 몫이 돌아왔다. 희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on/off 스위치처럼 모 아니면 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나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서 주변을 의식하고 나를 죽이며 살았던 걸까. 바보같이. 이기적인 열매의 달콤함을 알아 버린 나는 굳이 ‘희생을 강요하는 성숙’의 시절로 돌아가지 않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다큐멘터리에나 나오는 먼 얘기가 아니다. 주변만 둘러봐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의사와 반대되는 결정에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웃는 낯으로 따르는 사람들. 특히나 나이에 따른 행동수칙에 엄격한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주위를 의식하고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역시도 이 무서운 증후군에 휘말려 버릴지도 모른다.
나잇값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이라는 풀이 대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설정되는 인간 행동의 기본값’으로 말이다. 이 안에는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숙하게 굴어야 한다’는 명제는 없다. 나이에 대한 기대치든 다른 어떤 기대치든 상관없이, 위협적으로 변화하는 삶 속에서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태도야 말로 자신만의 나잇값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