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다는 것?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좋다.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교양이 있고, 지식도 풍부하고, 대화의 폭도 넓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나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있어 보이는(?) 책도 빌려 보고 전자책도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으려 하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책장만 펼치면 집중이 안 된다. 종잇장 위 활자들이 둥둥 떠다니고, 주변 소음이 더 크게 들려온다. 잔뜩 마음을 먹어야 간신히 책장 몇 페이지를 넘길까 말까니 답답할 노릇이다. 난독증을 의심해 본 적도 있지만, 순식간에 빠져들어 완독한 책들도 있기에 이마저도 핑계거리가 되지 않는다. 실패한 경험이 쌓여 갈수록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
작가를 꿈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의 이런 성향은 더 수치스럽고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다 작가지망생임을 밝히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다독하는 사람일 거라고 오해했고, 나에게서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며 반짝이는 눈망울들을 볼 때면 괜시리 사기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책 읽기를 두려워한다는 건 셰프가 칼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조바심이 들어 다시 책을 집어 들면 같은 구절만 반복해서 훑고 있는 나였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금의 버퍼링도 없이 책장을 술술 넘기던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숨 쉬듯이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주지 않은 걸까, 애꿎은 원망의 화살을 밖으로 돌려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동경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 책 많이 읽는 사람을 동경하는 만큼, 그들은 내게 더 크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지만, 동시에 나의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해졌다. 도가 지나친 지적 허영을 맥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에는 더없이 초라해졌다. 영화 <굿 윌 헌팅>에 나오는 천재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해 본다. 수학, 법학, 역사, 철학,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섭렵해 화려한 말발로 입씨름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주인공 윌은 하버드생을 발아래 놓을 정도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꼭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무기가 아니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책 하나로 세계를 꿰뚫어 보는 근사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자꾸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그것이 얄밉고도 아쉽다.
책이 잘 안 읽히는 이유를 곱씹어 보니, '읽고 싶다는 욕구'보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앞섰다는 결론이 나왔다. 책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책을 읽는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삐거덕거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독서의 본질을 대하는 태도부터 어긋나 있었다. 질문을 바꿔야겠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싶은가? 그건 아마도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을 겪어 보고, 나보다 인생을 더 살아본 이들의 노하우를 얻고, 사고를 넓히고,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를 즐기면서 감성의 폭을 넓히고, 무엇보다 그런 좋은 영향을 주는 글을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함일 것이다.
영국드라마 <패트릭 멜로즈>의 원작자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특유의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말을 지면 위에 쏟아냄으로써 나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함이었지만, 나 역시 최종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많은 이들이 사랑한 글이 어떤 글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한 글들은 분명 쉽게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쓴 작가들 또한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면서 수많은 고민을 토해냈을 것이다. 그토록 어렵게 쓰인 글을 끈기 하나 없이 읽길 바랐다니, 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쉽게 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