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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조의 호소 Oct 06. 2018

자유롭고 싶지만 원칙주의자다

자유로운 삶의 역설

 틀에 박힌 건 답답하고, 똑같은 건 지겨워하는 내가 원칙주의자라니.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다.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며 살던 나였기에 이 사실을 자각하고 난 충격은 꽤 오래갔다. 원칙이란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 규칙이나 법칙'이다. 내가 무의식 중에 지켜왔던 규칙(Rule)을 몇 가지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답답하다.


1. 음식은 손으로 집어먹지 않는다

2. 약은 식후 30분 알람 맞춰 제때 먹고, 복용 전후로는 유제품을 먹지 않는다

3. 물건은 반드시 제자리에 두고, 옷은 옷걸이에 건다

4. 퇴근은 6시 정각에 한다

5. 지갑 속 카드는 마그네틱이 손에 닿지 않도록 거꾸로 뒤집어서 꽂는다

6. Give and Take는 확실히 해야 한다

7. 기념일은 어떻게든 챙기는 것이다

8. 주말은 집에서 쉬어야 한다


 건전한 원칙은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만들어 주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지만, 문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원칙주의자에게 있어 원칙이 무너진다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는데, 이를 테면 약 먹을 타이밍을 놓친다거나 필요한 물건이 제 자리에 없을 때, 퇴근시간 넘도록 회사에 묶여있을 때와 같이 원칙을 벗어난 상황이 생기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견딜 수 없는 짜증이 솟구친다. 도미노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틀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세운 규칙대로만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에, 눈을 꼭 감고 평정심을 찾으려 애쓴다.


 원칙주의자로 사는 것은 불편하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라는 우려 아닌 우려를 들어야 하고, 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잠재적 죄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같이 사는 동생은 내가 고집하는 행동규범(?)과 건건이 부딪히다 어느 날 “내 생활패턴도 존중해 주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에게 규칙이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나름의 원칙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최대한 머글(소설<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나온 신조어로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을 총칭하며, 덕후들 사이에서는 덕후가 아닌 일반인을 지칭함)처럼 행동을 했다. 봐도 못 본 척, 까다롭게 굴기보다는 무난하게. 그래야 사람들과 별 탈 없이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 덕에 가까운 지인이나 예리한 타인 몇 명 빼고는 내가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인간은 모순덩어리라 했던가. 차라리 온전한 원칙주의자라면 좋겠지만, 사실 난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뭐든 할 수 있는 삶, 그 맛은 어떨까? 예전에 만났던 이성친구 한 명이 떠오른다. 그는 살면서 봤던 사람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분 따라 외국 여러 나라를 돌며 몇 년씩 살아 보고,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는 대신 직접 맞는 걸 좋아하고, 풀밭을 맨발로 걷거나 바닷가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음식을 먹을 때 인도식이라며 손으로 집어 먹는 걸 보면 기겁하기도 했지만, 그의 거침없는 마인드가 늘 부러웠다. 그런 그의 이미지를 닮고 싶어서 그를 만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였고, 그는 그였다.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라 해서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원칙에 갇혀 살면서 자유를 좇다니, 우스운 아이러니다.


 잘 생각해 보면, 자유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화려하거나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원칙에 얽매여도 내가 그것을 지키며 역으로 해방감을 느낀다면, 그 또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남들이 강요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가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자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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