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에 새겨진 아타튀르크의 숨결
도시는 숙명적으로 문명과 역사의 흥망성쇠와 함께한다. 앙카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스탄불에서의 꿈같은 황홀한 여행 끝에 어젯밤 앙카라에 발을 디뎠다. 그들의 두 번째 여행지다. 오늘날 튀르키예의 수도이고 과거 터키공화국 수립과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튀르키예 근현대사의 여정을 품고 있는 도시이다. 또한, 지난 수천 년 동안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동적인 서사를 묵직하게 간직하고 있는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여행 이틀째를 맞이한다.
그가 눈을 뜬 것은 한창 단잠에 빠져 있어야 할 03시 48분이었다. 튀르키예 땅은 유난히 밤이 길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4시간가량 더 있어야 한다. 해가 지는 시각은 우리와 비슷한데 뜨는 시각은 늦은 편이었다. 겨울철에는 낮이 짧고 밤이 길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겨울철 특징이다. 창밖으로 그들이 타고 온 버스 외에도 몇 대의 버스가 더 보였다. 어제 그들도 늦게 호텔에 들어온 편인데, 그들보다 더 늦은 시간에 들어온 버스리라. 새벽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간에 잠에서 깨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몸이지만, 때론 피곤할 법도 한데 잠은 왜 이리도 일찍 깨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잠시 그저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호텔 마당을 내려다본다. 잠을 다시 청할 것도 아니고, 청한다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다시 잠들기엔 또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물 한 컵을 들이켜고 어제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리며 간단한 메모를 남긴다. 메모라 봐야 그저 몇 자 끄적거리는 것이다. 어제 이스탄불에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일명 블루 모스크와 아야소피아를 관람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 그랜드 바자르 구경을 마치고 차에 올라 앙카라 인근, 과거 오스만 제국의 군사 요충지였던 베이파자르 마을을 둘러보고 앙카라 외곽인 하투사 베케이션 테르말 클럽(Hattusa Vacation Thermal Club) 히타이트 아야(Hittite Ayas ( http://www.hattusa.com.tr/ ))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Thermal은 튀르키예어로 온천을 의미한다.
지도를 열어 호텔 주변을 살펴본다. 아침산책으로 적당한 코스를 살펴보기 위해서 뒤적거리는 것이다. 이곳 히타이트 아야 호텔 근처에서 약 1.5㎞ 거리에 로마 목욕탕(Roma hamami)이 눈에 들어온다.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왕복 1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로마시대 때의 목욕탕이 있었던 곳인 모양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튀르키예 전역엔 고대 정착지를 비롯하여 로마시대의 유적이 꽤 남아있는데, 이곳은 므니조스Mnizos 고대 도시 유적이 남아있는 역사유적지다. 지도에 ‘Mnizos Acient City Ruins’라고 표시되어 있다.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므니조스는 당시 이 지역의 중심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맘은 로마 제국의 목욕 문화에서 비롯되긴 하였지만,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예배 전 몸을 씻는 곳으로 여겼기에,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앞에 있던 하세키 후렘 술탄 목욕탕처럼 모스크 가까이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스크 앞에 예배 전 손, 발, 입안, 얼굴, 팔뚝, 머리, 귀 씻기를 하는 ’압데스’를 위한 수도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슬람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고대 로마에서 목욕탕은 테르마이thermae라는 커뮤니티 성격이 강한 상당히 큰 공간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의 일상과 문화가 깃든 특별한 장소로 도서관은 물론, 연극도 볼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도 이곳에서 그저 의미 없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살았을 것이다.
로마의 목욕 문화를 이어받은 오스만 제국에서도 역시 단순히 씻는 곳을 넘어서 사교의 장소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의 하맘은 고여 있는 물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목 민족 문화의 영향으로 욕조가 없고 뜨거운 증기로 땀구멍을 열어 노폐물을 씻어내는 증기탕이었다.
목욕탕 가운데 괴벡타쉬Göbektaşı 주변에 물이 나오는 세면대가 있어 자연스레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구조이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은 마을 여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결혼생활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목욕을 즐기며 ‘겔린하맘(GELİN HAMAMI)’이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여자들과 갇혀 지내다시피 한 하렘의 여자들은 하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따듯한 괴벡타쉬에 모여 수다도 떨고 마사지도 받으며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하루 종일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민수와 원철과 함께 05시 17분 호텔방을 나와 아침 산책에 나선다. 버스 한 대가 호텔을 빠져나간다. 10여 분가량 걸어 나오니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밝은 곳에 하투사Hattusa라 쓰인 입간판이 세워진 리조트 입구가 보인다.
앙카라 시민들의 휴양을 위해 조성된 하투사 리조트 단지이다. 이 간판엔 히타이트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사슴조각이 로고로 새겨져 있다. 히타이트 문명에서 나온 동물 조각 중에서 특히 사슴 모양의 조각은 고대 히타이트 예술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앙카라 대학교 앞 시히예 광장에서 히타이트 사슴조각을 볼 수 있다. ‘시히예Sıhhiye’는 건강을 의미하는 튀르키예 말이다.
하투사는 청동기 시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인데,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150㎞ 거리의 보아즈칼레Boğazkale 일대의 지역으로 이곳 일대의 히타이트 제국 유적은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저 이른 새벽 아침 산책을 나온 것인데,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이지 싶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천년의 역사 속으로 걷는, 묘한 느낌이 드는 아침 산책이다.
꼭두새벽에 익숙하지 않은 길을 찾아가며 로마 시대의 목욕탕 유적지를 반환점으로 정하고, 안개가 가득한 도로변으로 들어서니 붉은 가로등이 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언덕 위로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민가 한 채가 겨우 시야에 들어온다. 어쩌다 지나가는 차량은 상당히 위협적이다. 안개가 가득한 이런 날 걷기엔 다소 위험하게 느껴지는 인도와 차도가 구분 없는 도로이다. 민수와 원철이 갓길로 바짝 붙어 걷는다. 비니 모자를 눌러쓴 그가 앞서가며 길을 잡는다. 가로등은 이따금씩 있을 뿐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지도상 목욕탕 유적지에 당도하였지만,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탓에 유적지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민가도 없는 구릉지에 붉은 조명이 밝혀져 있다. 주위에 허물어진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지 싶었지만, 어둠이 걷히지 않은 데다 안개까지 짙게 끼어 보이는 듯 마는 듯 어슴푸레 보이는 유적지를 확인하고 되돌아선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새벽, 주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고 그저 줄지어 이어지는 붉은 가로등 빛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아직 잠들어 있는 대지를 감싸는 듯 따듯한 불빛은 마치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책에서 떨어져 나온 책갈피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금세라도 그곳에서 히타이트 인들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그렇게 소리 없는 무성의 서곡이 이어지는 신비로운 빛으로 물든 새벽길을 걷는다.
이른 시간에 하투사 베케이션 테르말 클럽 입구의 반인반수 조각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Kentauros 모습을 한 조각상 앞에 잠시 멈추어 사진촬영을 하는 그들을 보고 밤새 당직 근무를 서고 있는 여성 직원이 환하게 웃어준다. ‘규나이든!’이라 답례를 건네고 호텔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이른 새벽부터 ‘땅을 정복하라 가자’는 뜻의 튀르키예 인사말처럼 어둠과 안개를 뚫고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지를 찾아 아침 산책에 나섰으니 당직을 서던 직원이 보기에도 익숙한 광경은 아니었지 싶다.
어젯밤, 대지의 온기를 서서히 걷어간 찬 바람이 기온을 조금은 떨어뜨린 것 같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감싸인 나뭇가지는 마치 은은한 달빛을 받은 것처럼 푸르스름한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한국에서 싸운 터키인 기념비(Kore'de Savaşan Türkler Anıtı) 한국공원
06시 30분, 늘 그렇듯이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07시 30분 호텔을 떠나 오늘 첫 번째 일정인 한국공원으로 향한다. 07시 40분쯤부터 멀리 산마루 너머에서 붉은 기운이 감돌더니 느지막한 08시 20분이 되어서야 아침 해가 마치 늦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지막한 산과 구릉지가 이어질 뿐, 우리네처럼 첩첩산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아니었다. 어떤 곳은 시야가 확 트인 평원같이 느껴졌다.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 까지는 건물도 그저 이따금씩 보일 뿐이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 내륙도시 앙카라였다. 그렇게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천천히 도심으로 진입하며 약 30분을 더 달려 08시 50분에 앙카라 종합운동장인 Ankara Spor Salonu 근처 한국공원에 도착한다.
한국공원은 1950년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1973년 한국 정부가 튀르키예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헌정한 추모공원이다. 공원 중앙에 세워진 '한국참전 토이기 기념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모방하여 만든 불교적 순례지 의미를 담은 추모탑이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죽은 곳이 알라의 품으로 여기는 이슬람 종교의 영향으로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지 않은 참전 튀르키예 희생자 462구의 시신은 부산 UN묘지에 안치되었다. 또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산 16번지에는 ‘터키 한국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들은 잠시 묵념을 올리며 이들의 값진 희생과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공원을 둘러본다. 탑 한가운데에 ‘여기 한국에서 헌신한 토이기 용사 묘로부터 옮겨온 흙이 담겨있노라’라고 한글로 새겨진 글과 ‘이 탑은 토이기 군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다. 앙카라 시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세워지게 된 이 탑은 토이기공화국 건립 제5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한국 정부가 토이기 국민에게 헌납하다. 1973. 10. 29’라고 새겨진 표지석 글을 읽으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 본다.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였다. 이곳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튀르키예 군의 파병 규모는 10개 여단 21,212명의 참전으로 자유를 수호하였으며, 휴전 후까지 모두 35,324명을 파견했다. 이들 중 전사자는 724명, 실종자 166명, 그리고 1,599명이 부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한국공원 ‘터키 한국전쟁 참전 기념탑’ 기단석 벽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을 천천히 읽으며 당시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숭고한 이들의 넋을 마음에 새긴다.
대다수의 여행자들은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 한국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그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튀르키예 군인들이 이렇게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잘 몰랐던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부분이 잊혀 간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나마 앙카라를 여행하며 한국공원을 보게 되었고,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숭고한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튀르키예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투병력을 파병한 나라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한국전쟁엔 두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첫 번째는 6월 25일 침공한 북한은 3일 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한다. 그런데,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피난을 하였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무슨 이유인지 3일을 그대로 쉰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에겐 승세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3일을 쉰 이유는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중 한 가지이다.
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이유는 스탈린의 전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김일성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흔여덟 번이나 거절하며 한국전쟁을 원하지 않았었다. 1904년부터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소련은 한반도는 안중에도 없었고 일본을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 즉 미군의 군사작전권에 일본만 포함시키고 한국을 제외하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이를 기화로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은 해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80분을 면담하며 침남을 설득하는데,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무슨 전쟁이냐며 북한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 후 다시 설득에 나선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허가를 받아오라며 돌려보낸다. 결국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5월 14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 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마오쩌둥을 핑계 삼아 점잖게 거절한 셈이었다. 그 후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오자 마지못해 찬성하며, 대신에 직접 참전은 하지 않고 무기만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소련제 탱크를 북한에 제공한 것이다.
단지 스탈린이 한국전쟁에서 얻으려 한 것은 점차 커지고 있는 또 다른 공산주의 국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중국과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여 힘을 빼는 국면에서 일본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중국과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서로의 힘을 빼야 했다. 그런데, 그러한 스탈린의 전략과는 맞지 않게 북한이 너무 빨리 서울을 점령하는 바람에 미국이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스탈린의 전략과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당시 전황이었기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고 지체하며 지연 전략을 쓴다. 이때 스탈린의 지연 전략은 남한에 3일의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그럼에도 전세는 대구까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간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반대하면 연합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기권을 행사한다. 그래서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결의가 이루어지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튀르키예군 등 16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이때 소련의 불참은 미국을 참전케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전략으로 추정된다.
결국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General Douglas MacArthur)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2주 후 서울을 수복하며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2사단이 38선을 넘는다. 후에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한 것이다. 10월 19일엔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7일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모두들 이제 전쟁은 끝났다 했지만, 이때 정규군도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이 11월 중순부터 개마고원 일대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전쟁의 양상은 스탈린의 계산대로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당시 맥아더는 중공군 포로들이 늘어나는 상황을 간과하였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은 밤에 움직이며 은밀히 북한 땅으로 스며드는 중공군 문제가 전세를 장담할 수 없는 문제라고 분명한 경고신호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이를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전세를 심상치 않게 생각한 당시 미국의 대통령 해리 S. 트루먼도 맥아더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얼마 안 있으면 임기가 끝나는 대통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 국내 여론이 차기 대통령으로 전쟁영웅 맥아더가 거론되는 때였고, 전쟁에 자신감을 내보인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에 대하여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으로 날아와 맥아더를 만나지만,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도 호언장담을 하며 트루먼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결국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뒤집어지고,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며 1.4 후퇴를 하기에 이른다. 맥아더의 방심과 오판의 결과였다.
이후 한국전쟁에서의 독단적인 맥아더의 행동은 당시 대통령 트루먼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또한, 중국의 개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방심하고 있던 맥아더는 수십 개 사단 급 병력의 중국 정규군이 개입하자 보급과 충원의 근거지인 만주에 항공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 허가를 요청하며, 장제스 총통 휘하의 중화민국군의 지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당시 미국 정계는 소련의 참전과 확전을 우려하여 맥아더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갈등을 빚게 되었고, 맥아더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엔군 사령관에서 물러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소련의 힘과 의지를 과대평가한 전략적 판단 실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생기는 미국 내 여론 악화와 정치적 부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부대가 해체되고 동원 가능한 병력이 적었던 이유로 맥아더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장기화되면서 휴전론이 대두되었으나, 미국과 중국의 힘을 빼려 했던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던 스탈린의 반대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지지부진한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러던 중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돌연 사망하며 휴전협상이 급진전된다. 사실상 1951년 12월 11일부터 진행된 휴전협상은 유엔군 측의 ‘자발적 송환 원칙’과 공산군 측의 ‘강제적 송환 원칙’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며 1953년 6월 8일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에 당시 휴전을 반대했고 중립국 송환위원회 심사에 따라 포로 송환이 결정될 경우 송환을 원치 않는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남지 못할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거제 수용소의 반공포로 27,000명을 미국과 유엔군의 동의 없이 석방한다. 사실 포로의 인권보다는 휴전협상에서 남한이 배제된 불만을 강력하게 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으며 공산군 측은 석방한 포로 문제를 제기하며 재수용을 요구하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휴전협상에 참여하지 않기에 이른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는 휴전은 사실상 현실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에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 한 전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분석이다.
아무튼 1953년 7월 27일 22시에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 체결로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며 분단이 된다. 후에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 상륙 대비 실패', '서울 조기 포위 실패', '춘천 조기 점령 실패' 3개를 꼽은 바 있다. 한국전쟁은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이었고 동족 간에 벌어진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어릴 적 불렀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이라 시작하는 ‘6.25의 노래’가 그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전쟁의 아픔과 비극, 상실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바로 이러한 참혹한 전쟁 직후, 반공방첩 구호가 거리 곳곳에 나부끼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을 목청껏 불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 70년째를 맞이한 한반도 현실은 여전히 전쟁 중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앙카라 한국공원 방문은 새삼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의 한반도엔 평화로운 통일된 대한민국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멀리 타국까지 와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싸웠던 이곳에 잠들어 있는 튀르키예 군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억하며, 튀르키예 군인들의 참전과 희생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한국공원을 떠난다.
히타이트 문명의 중심지 앙카라와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연안 해상권 장악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150㎞ 거리의 보아즈칼레 Boğazkale 일대의 지역 히타이트 제국의 하투사 유적은 앙카라가 과거 히타이트 문명의 중심지였음을 잘 설명하여 주는 고대 유적이다. 지구 15억 년 역사 중 인간은 약 400만 년 전에 출현한다. 그리고 직립보행을 하는 인류의 조상은 4만 년 전에 출현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기원전 8,000년에 이곳 앙카라에는 최초로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 생긴다. 5000여 가구가 모여 산 것으로 전해지는 인류 최초의 부락은 지금의 튀르키예 땅인 아나톨리아반도 남동부의 카탈후위크 Çatalhöyük에서 발견된다. 1957년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하여 발견된 카탈후위크 이전엔 이스라엘의 예리코가 인류 최초의 부락으로 알려졌었다. 소아시아인 1만여 명이 모여 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카탈후위크의 인류 최초의 부락은 조사 결과 원시적인 직조기술과 포크와 숟가락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밝혀지는, 수 천년 이후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매우 체계적인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인류 문명이었다.
기원전 4000년 메소포타미아문명은 현재까지 밝혀진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그리스어 메소포타미아 (Μεσοποταμία)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의미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 즉 지금의 이라크와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의 땅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에 모여 살던 고대인류는 건축, 그릇 제작 등 직업을 갖고 살았으며, 왕이나 사제 등이 지배하는 사회의 형태를 갖춘 문명이었다. 카탈후위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유프라테스강 근처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땅이다.
튀르키예인의 조상은 몽골과 중국 변방에 살았던 유목 민족인 훈족과 튀르크 족으로 알려져 있다. 튀르크 Turk or Türkic는 ‘힘이 세다’는 뜻이다. 이를 한자식으로 가차 하면 흉노匈奴와 돌궐突厥인데, 진나라(秦)-한나라(漢) 시대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으로 과거 고조선 시대부터 중국대륙에서 우리와 이웃에 살던 민족이다. 중국의 한漢나라와 수隋, 당唐을 거치며 과거 우리 조상들과 함께 경쟁하며 때론 서로 적대적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중원의 세력과 대항하였다. 하지만 중원 세력의 팽창과 변방지역의 안정 정책으로 결국 수많은 전쟁이 거듭되었고, 이로 인하여 차츰 세력은 약화되고 붕괴되어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 서쪽 아나톨리아반도로 이동하며 한반도에 남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어진 민족이다. 과거 고구려와는 서로 동맹을 맺고 수나라와 당나라에 대적하면서 형제의 연을 맺었고, 튀르키예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역사적인 이 내용을 들어 한국을 칸카르데쉬(kan kardeş Kore), 직역하면 ‘피의 형제’, 즉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로 가르치고 있다.
이후 11세기에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서 아나톨리아반도에서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고 술탄이라 부르는 황제를 세우고 비잔틴 제국과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십자군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그 후 셀주크 제국은 쇠퇴하고 튀르크 족에서 갈라져 나온 오스만 튀르크 족이 13세기말 오스만 제국을 세웠으며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을 점령하며 비잔틴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결국 유럽으로의 진출에 발판이 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은 물론 중동 및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통제권을 확보하고, 셀림 1세 때에는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를 정복하여 이슬람의 지도자인 칼리프 칭호와 세습권을 확보하며 이슬람 세계의 종주권을 거머쥐게 된다. 셀렘 1세 이후 술레이만 대제는 오스만 제국의 최고 번영을 이루며 헝가리와 동유럽 일부, 이라크를 정복하여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를 통합하는 등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세력 확장이 이루어지고 지중해, 흑해 연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며 당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해양 루트를 장악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해상권 장악은 유럽 사회엔 매우 큰 충격이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 인도에서 들여오는 후추, 정향, 육두구, 계피는 유럽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향신료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인도로 가는 해양루트가 차단되며 소금이나 뿌려 먹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인도에서만 나오는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해서 인도를 가야 하는데, 한 번 갔다 오면 금보다 더 비싼 가격에 교역이 이루어져 떼돈을 벌었었는데, 지중해가 막히는 바람에 새로운 바닷길이 필요했던 유럽은 궁여지책으로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간다. 항해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너무 험난한 바닷길로 인하여 인도로 가는 바닷길 자체가 목숨을 걸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콜럼버스는 이러한 험난한 바닷길 상황을 고려하여 ‘그러지 말고 거꾸로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시대인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먼바다로 나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시대에서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로 여겨졌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구가 둥글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마귀로 몰려 화형을 당하여 죽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니 감히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한 오스만 제국의 존재는 상당히 위력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유럽은 14~16세기 르네상스를 거치며 새로운 항로를 찾게 되었고, 급기야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세계사의 흐름을 중세에서 근세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겨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오스만 제국의 패망, 그리고 튀르키에 공화국 수립과 아타튀르크 대통령
아침의 앙카라는 점차 깨어나는 도시의 숨결과 함께 시작된다. 붉게 떠오른 태양이 점차 도심을 햇살로 가득 채우고 고대 문명으로부터 이어진 다양한 문명의 흔적을 비추며 거리마다 가득한 역사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앙카라의 아침이다.
한국공원을 떠난 버스는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의 번화한 거리를 달린다. 딱 보기에도 반듯반듯 잘 구획된 시가지였다. 북동과 서남을 이어주는 200번 국도가 앙카라 도심을 관통하고 동서로 140번 국도, 남북으로 750번 국도와 O-21 고속도로가 앙카라 외곽을 순환하는 O-20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촘촘한 도로망을 갖춘 도시였다. 히포드롬 거리(Hipodrom Cd.)를 따라 이어지는 스포츠단지와 문화센터(Atatürk Kültür Merkezi), 시청, 독립전쟁박물관, 앙카라 대학교, 법원(T.C. Ankara Adalet Sarayı), 케츨릭 공원, 콘서트 홀(CSO Ada Ankara) 등이 밀집되어 있는 앙카라 중심가이다. 한국공원에서 남쪽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튀르키예 어린이들부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찾는 앙카라 최대의 명소,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다.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영묘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광장은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만, 튀르키예인들에겐 특별하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다. 앙카라 법원 남쪽 블록엔 백화점과 쇼핑몰이 밀집되어 있는 와크즐라이(Kizilay) 번화가로 이어진다.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일으켜 세운 아타튀르크 대통령, 그의 희생과 지도자로서의 업적은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의 존재는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하지 싶다.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아타튀르크 이상과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튀르키예인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앙카라의 거리와 광장, 도시의 각종 시설과 명소에 ‘국민영웅’, ‘투르크인의 아버지’란 수사와 함께 존재하였으며, 수많은 방문객들로 늘 북적이는 기념비와 영묘, 박물관 등 도시 곳곳에서 아타튀르크를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튀르키예 여행 이틀째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여행자일 뿐인 그들이 본 거리와 시장은 물론이고 문화센터와 다리, 공원 이름까지 아타튀르크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정도 되면 아타튀르크의 나라, 아타튀르크의 도시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것만 이 정도인데, 궁금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할 지경이지 싶다.
아타튀르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튀르키예인들에게 아타튀르크는 어떤 의미일까?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에 새겨진 아타튀르크의 숨결은 무엇일까?
오스만 제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술레이만 대제 시절인데, 1869년 오스만 제국은 32개 나라의 엄청난 영토와 3억 명이 넘는 인구를 점유하고 지배하는,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이후 가장 큰 대 제국이었다. 그러던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르네상스에 따라가지 못하고 산업혁명에서 뒤처지면서 점차 침체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는 400년간 이슬람 세력이었던 오스만 제국에 지배를 받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유럽 서양문명의 바탕이었고 요람이었던 문화를 낳은 그리스가 터번을 덮어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가 차제에 그리스 독립을 도와야지 않겠는가? 라며, 유럽 여러 나라를 설득한다.
바이런의 주장은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문화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바이런은 그리스가 유럽 서양문명의 중심지였고, 그리스 문화가 바탕이었다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에게 그리스 독립을 촉구했고, 그 결과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난다. 1829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으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리스의 독립은 그리스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각과 자존심을 회복하는, 유럽 역사상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리스 독립 후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발칸 지역의 다른 국가들도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쇠락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권은 상당히 약화되는 결과가 빚어진다. 과거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지탱해 온 땅이었던 발칸반도의 독립운동은 국가 간의 경계를 다시 정의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발칸반도의 독립은 새로운 도전과 갈등의 씨앗이 된다. 발칸반도 내에 인접한 여러 작은 나라들이 서로 적대시하며,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제1차와 제2차 발칸전쟁, 그리고 이후의 다양한 분쟁과 사태로 나타났다.
알바니아와 루마니아 분쟁,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분쟁, 코소보 인종청소 사태 등이 발발하며. 1912년, 발칸 지역은 완전히 화약고로 변한다.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통제권 상실은 발칸반도의 내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12년에는 제1차 발칸전쟁, 1913년에는 제2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여 각 나라들이 자신의 영토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지역 내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갈등은 이후의 역사적 사건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빈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이때 대성당으로 향하던 대공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역사는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 적었다. 과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처럼, 합스부르크의 황태자를 저격한 사건이었다. 그 결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 1914년 7월 28일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이 휩싸이며 대전이 터지게 되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같은 계열의 슬라브 민족이었기 때문에,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나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당시 발칸반도에 대하여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국익과 맞아떨어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러시아의 참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국이었던 독일 제국이 참전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선언하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식민지 개척경쟁에서 열세에 있었던 독일 제국의 참전은 독일을 형제국이라 여긴 오스만 제국의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참전하며 세계대전 양상을 띠게 된다. 결국 독일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에 선전포고하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저격사건으로 인하여 세계대전이 벌어진 셈이다. 그러던 차에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며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고 미국이 참전하게 된다. 결국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독일이 항복하고 독일 제국과 연합국 사이에 1919년 6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어 1920년 1월 10일 공포된다.
1881년, 베르사유 조약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인되는데, 1871년 1월 18일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 전쟁)에서 승기를 완전히 잡은 프로이센이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종전을 선포하고 독일 제국의 황제로서 빌헬름 1세의 대관식까지 열면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48년 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던 프랑스가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을 협약의 서명 장소로 선택하여 이를 되갚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로써 독일은 패망하게 되고, 동맹국으로 참전했던 오스만 제국은 1920년 8월 10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서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 Traité de SèvreS으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당시 4 등분된 오스만 제국은 영국, 프랑스와 400년간의 지배로 서로 앙숙이었던 그리스 영토로 편입된다.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가 아닌 영토를 모두 해체하여 점령하며, 이 조약에 따라 연합군은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한다. 특히, 지중해 동쪽 지역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및 레바논이 설치되어 점령된다.
그러나 1920년 4월에 열린 생 르노 회의에서 공화파인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과 메흐메드 6세의 오스만 제국 간 체결된 세브르 조약 중 이즈미르와 동 트라키아 지역을 그리스에 할양하는 것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세가 아나톨리아를 분할지배하고 터키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의사를 제시하였다. 결국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가져왔고, 터키의 독립과 국경 재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튀르키예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과 함께 패망한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이후 연합국과 메흐메드 6세의 오스만 제국 간 체결된 세브르 조약 철회와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한 연합군에 강력하게 대항하는 튀르키예의 민족 운동이 확산되었고, 다르나넬스 해협의 차낙칼레에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갈리폴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연합군은 1922년 9월 18일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서 철수하게 된다. 또한 세브르 조약으로 국토가 해체된 상황에서 추가적인 영토 확장을 노리던 그리스의 도발로 시작된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주도로, 에게 해 연안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회복하며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튀르키예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다.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승리로 세브르 조약을 철회한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과 다시 협상을 벌여 로잔 조약을 체결하고, 1923년 현재의 튀르키예 영토를 확정 지으며, 같은 해 10월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일 의회에서 술탄국 폐지와 술탄 메흐메트 6세를 폐위하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무혈로 종식하며 터키 공화정 시대를 열게 된다.
대통령에 취임한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제국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오늘날 튀르키예의 토대를 세운다. 그가 실시한 개혁으론, 1924년,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하였다. 이는 과거 오스만 제국 몰락의 원인이 정치와 종교가 결합되어 개혁이 어려운 술탄의 통치방식 때문이라 판단하여 ‘종교는 종교일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세속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히잡과 부르카, 니캅 등 여성들을 이슬람 복장에서 해방시키고,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전통적으로 사용한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한다. 1926년에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는 민법 개정을 단행하였으며, 1928년에는 고유문자가 없어 아랍 문자를 빌어 기록하는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과감하게 폐기하고 오늘날 튀르키예가 사용하는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이어서 1930년에는 여성 선거권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아타튀르크 대통령은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주도한 국민영웅이다. 성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백성이었던 아타튀르크 대통령은 무스타파라는 이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케말은 군사학교에서 받은 이름이다. 1934년 공화국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 즉 ‘투르크인의 아버지’란 의미가 담긴 성명을 '가족명에 관한 법'에 따라 부여하였다.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앙카라를 수도로 정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지정학적인 이유가 더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과 동로마제국을 거치며 역사적으로 수차례 정복당한 도시이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과 오스만 제국의 점령 등 정복이 거듭된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터키 공화국 수립의 건국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은 내륙의 조그만 마을, 1923년 당시에는 수도로서의 기반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다.
아무튼, 오늘날 튀르키예는 이러한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개혁으로 상당한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는데, 1963년부터 경제개발을 시작하며 공업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철강과 시멘트 등 중공업 분야보다 식음료, 섬유, 피혁 가공업 등 경공업이 발달하여 세계 유명 브랜드의 OEM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삼면이 바다인 아나톨리아반도의 광활한 영토에서 사시사철 먹거리는 풍부한 편이지만, 석유 등 에너지 자원은 부족하다. 전 국토에 흩어져 있는 고대 역사 유적으로 매년 관광 수입이 증가하고 있고 자동차와 가전산업이 글로벌 기업과의 합작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조선업 선도국으로 2007년 선박 수주량 기준으로 중국, 대한민국, 일본 다음으로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한다. 또한, 소련에서 독립한 튀르크계 나라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하여 이들 나라의 막대한 천연자원을 개발하며 에너지 자원 확보에도 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튀르키예 학생들은 7세부터 15세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받고 등하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스쿨버스를 타고 다닌다. 우리와 비슷한 수학능력시험을 거쳐 대학을 진학하는데, 대부분 국립인 튀르키예의 대학은 학비가 전액이 무료이다. 최근엔 콜레즈라 부르는 초. 중등 사립학교가 생겨나며 교육으로 미래를 꿈꾸는 나라이다.
튀르키예 대중교통은 트램과 버스 택시로 매우 복잡하긴 하지만 교통망이 발달되어 있는 편이다. 특히 돌무쉬(마을버스, 손님이 다 차야만 출발한다. 돌무쉬는 ‘가득 차다’는 뜻이다)는 택시보다 가격도 싸고 마을 순환버스여서 인기 있는 교통수단이다.
튀르키예를 여행하다 보면 이네들은 담배에 꽤 관대하다 싶은데, 심지어 그랜드 바자르 내에서도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전통적인 담배는 물 담배 나르길레이다. 여러 향료를 태워 그 연기를 물이 담긴 용기를 통과시켜 파이프로 피우는 것인데, 이스탄불 등 대도시엔 나르길레 전문 카페를 볼 수 있다.
국토의 95%가량이 아시아에 속한 튀르키예, 사실상 아시아에 가깝지만 유럽과 일부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에 걸친 영토를 갖고 있고 과거 동로마 제국부터 비롯된 유럽에 가까운 문화로 인하여 유럽연합에 가입을 희망하고 있지만, 이슬람 국가인 점과 과거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배로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반대로 40여 년간 준 회원국에 머물고 있다.
오늘날 튀르키예는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대통령 집권 하에 경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며 리라화 가치의 지속적인 하락과 실업자 증가, 공식 인플레이션 90%라는 엄청난 물가폭등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저금리 정책으로 실질적인 가계소득이 급격히 떨어지는 등 대외 신인도 하락과 이에 따른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터키의 탄생을 목격한 도시 앙카라는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튀르키예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곳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