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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리 아르카다쉬 칸카르데쉬 코레

오르혼 비문에 남긴 고구려와의 형제 맹약

by 조영환


칸카르데쉬!

한국공원 관리인이 사진을 찍느라 일행 중 가장 늦게 공원을 떠나는 그에게 “칸카르데쉬!”라 말하며 서툰 한국말로 “형제나라”란 말을 덧붙인다. 따듯한 눈빛으로 배웅하던 공원 관리인의 모습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 떠오른다.


“칸카르데쉬라…, 코렐리라…”

사실 그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형제의 나라라 하는지, 어째서 우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인지를 솔직히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한국전쟁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우리를 도와준 인연 정도로 여겼는데, 이곳 앙카라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에서도 그리고 후에 여행하는 안탈리아, 코니아 등지에서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연신 ‘칸카르데쉬 코레!’란 말을 외치며 낯선 여행객일 뿐이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데린쿠유에서 오렌지 주스를 팔고 있던 노부부 상인도 그에게 주스를 건네며 한 말이다. 그저 상인들이 손님을 대하며 상투적으로 쓰는 말과는 엄청나게 느낌이 다른 말이었다. 다른 나라 여행에선 들어 볼 수 없었던 말이었고 뭔가 특별한 유대감까지 느껴졌던 말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원철과 민수도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아르카다쉬arkadaş는 친구를 의미하는 튀르키예 말이다. Koreli arkadaş는 ‘한국인 친구’로 번역될 수 있다. 그저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일 뿐인 그에게 ‘코렐리 아르카다쉬’가 아닌 ‘칸카르데쉬 코레’라 말하는 데는 반드시 연유가 있지 싶었다. 이스탄불을 여행하며 거리에서 보았던 ‘코렐리Koreli’란 상호와 함께 그에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칸카르데쉬 코레’라며 반기는 이네들에 비하여, 그가 받아들이는 이들의 말 ‘칸카르데쉬’는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온도차가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와는 10,000㎞, 비행기로 12시간이나 걸리는 땅에서 일찍이 가져보지 못하였던 낯설고 어색한, 말하는 이와 듣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온도차가 느껴지는, 쉽게 공감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나마 한국공원 방문으로 조금은 온도차가 줄어든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사실이다. 뭔가 다른 일들이 있었지 싶어 의문은 왜? 에서 어떻게? 그리고 무슨 연유로, 언제부터로 바뀌며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앙카라의 도심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창밖으로 바라본 도시의 높은 건물과 번화한 상점가는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다채로운 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앙카라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남기고 칸카라데쉬에 관한 글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가 알고 있던 지식은 너무나도 얄팍했기에 이 참에 공부 좀 해야지 싶었다.


역사는 결코 잊힌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 마음에 기억으로 새겨져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사실이 곧 인류의 역사다. 과거의 사실이 함축되고 함축되어 단 하나의 단어로 기억될지 언정 결코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의 삶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측면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인류의 소중한 기억을 우리는 역사라 기록하고 정의한다. 물론 다양한 시각과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정의되고 기록되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 인물, 문화, 사회적 변화 등을 기록하고 이를 이해하는 학문적인 과정이다. 인간 활동의 연속성과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역사인 셈이다.


역사는 다양한 문화, 국가, 인종, 종교 등에서 일어난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인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매우 중요하고 효율적인 도구이다. 정치적인 의사결정과 권력의 구조를 연구함으로써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국가 간의 관계와 갈등, 전쟁, 혁명 등의 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기록이다. 역사는 특정 문화나 국가, 또는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올바른 역사인식’ 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매우 중요한 역사를 보는 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튀르키예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역사적 인식은 매우 정확하고 분명했다. 오늘날 튀르키예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과거 몽골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던 투르크족에 두고 있다. 그가 알고 있던 돌궐족이 바로 투르크족이다. 돌궐突厥은 투르크족의 가차(假借)식 한자표기로, 중국의 기록이다.


튀르키예는 고대사의 일부인 이 내용을 중고등학교에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소명을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교육의 일환으로,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전문가가 아닌 그의 짧은 식견으로 보아도, 돌궐족과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과는 분명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돌궐족은 흔히 북방의 이민족 ‘오랑캐’ 정도였다.


사실 오랑캐라는 말은 미개하고 무지한사람을 이르는 ‘야만인野蠻人’의 의미도 내포된, 경멸의 감정이 섞여 있는 멸칭蔑稱이다. 오랑캐란 이 말에 사실상 함정이 있는 셈이지 싶다. 중국은 과거 명나라때 몽골 초원 등 북방지역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던 이민족을 우량카이Uriankhai라 했는데,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조선에서 오랑캐라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우량카이, 오랑캐는 정주 민족이었던 중국의 시각으로 기록한 말이다. 유목 민족은 정착민과는 달리 초원을 떠도는 특성 때문에 일찍이 문자를 갖지 못하였다. 때문에 유목민에 관한 기록은 정착민의 관찰에 의하여 상당히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인 형태로 기록된 측면이 있다. 역사적인 오류까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중국 위주로 기록된 말인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구는 둥글다. 물론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손바닥 안에서 위성지도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평면지도가 아닌 것이다. 당시 돌궐족의 입장에서 둥근 지도를 본다면 사정은 상당히 달라진다. 몽골 초원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방이고 변방이었지 돌궐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면 어찌 될까?


그는 구글 지도를 열어 거꾸로 돌려놓고 보기 시작했다. 중국이 아닌 몽골 유목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지 싶었다. 과거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차지했던 백제(요서경략설은 중국의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등 여러 역사책에 기록된, 백제가 한 때 과거 중국의 요서(遼西·랴오시)지역을 지배(경략·經略)하였다는 기록))가 중원세력에 쫓겨 바다 건너 동쪽 한반도로 내몰렸듯이, 오히려 중국이 북방의 돌궐과 고구려 등에 에워싸여 바다로 내몰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전혀 다른 신세가 되는 형국이었다. 그렇다면 돌궐과 고구려의 입장에서 오랑캐는 오히려 중원을 차지한 정주 민족이었던 한족이나 선비족이 되는 셈이었다.


보는 관점과 발상의 전환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역사 아닌가? 오랑캐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기록한 편협한 사고의 산물 아닐까? 마치 서양인들이 근대까지도 몽골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들을 싸잡아서 ‘타타르’라고 불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까? 우리는 과거 명나라가 기록한 이 오랑캐란 말 한마디에 사실상 그들 북방민족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후에 명나라가 낮춰 부르던 오랑캐인 여진족의 후손 만주족은 보란 듯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워 오늘날 중국 땅을 지배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랑캐’란 멸칭이 얼마나 그릇되고 오만한 시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편향된 시각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우월성을 과하게 포장하려 하고 있다.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영광으로 포장하려는 동북공정에 주력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동시에 서북 및 서남 공정을 통해 타슈켄트, 키르기스, 티베트 등과 같은 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한국, 일본, 몽골, 대만, 인도, 티베트(西藏), 신장(新疆)위구르, 베트남과 같은 인접 국가들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침탈하는 처사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북방 유목민족을 싸잡아 오랑캐라 멸칭하였던 과거 명나라의 그릇된 시각을 비추어 봤을 때, 결코 우연이 아니지 싶은, 그릇된 역사 인식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이러한 일탈적 역사왜곡은 우연이 아니라 국가적인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의 그릇된 역사 인식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자국의 역사를 과하게 포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그릇되고 불순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국제사회에서 큰 우려와 비판을 일으키고 있으며, 역사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인식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는 시점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튀르키예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 역사적인 뿌리를 돌궐족으로 정립하고 학교에서도 이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한다. 돌궐족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괵튀르크인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최초의 카간국인 괵튀르크 카간국(Göktürk Kağanlığı)을 건설한 민족이다.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 또는 카스피해의 초원 지역에서 발흥한 돌궐은 부민 카간(伊利可汗)과 후대 카간들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쪽으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초원, 4세기초부터 552년까지 몽골고원에 성립되었던 유목제국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동북아 북방 지역의 패자로 고대사에 등장한다.


중국은 589년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된다. 당시 몽골 지역에서 유연을 정복하고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돌궐의 침입을 우려한 수나라는 북방에 장성을 축조하였고,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을 오랑캐 정도로 취급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한때 수나라는 돌궐에 공물을 바치고 수나라 공주를 돌궐에 보내기도 한다. 597년부터 617년의 일이다. 6세기 후반 동과 서로 나뉜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자 수나라는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가 멸망하고,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한 선비족鮮卑族인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건국한다.


중국은 당나라를 중국의 역사 일부로 여기고 있지만, 이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주류인 한족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거나 수용하기를 꺼릴 수 있지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당나라 시기는 선비족에 의해 한족이 지배를 받으며 선비족에 복속된 한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나라는 618년부터 907년까지 지속된 왕조로, 중국 역사에서 교체되는 여러 왕조 중 하나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 걸쳐 다양한 인종과 민족 집단이 존재했으며, 한족 또한 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족 역시 선비족에 의해 지배되고 복속된 상태였다. 선비족의 지배는 한족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으며, 선비족은 당나라에서 정치는 물론이고 교육과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이러한 선비족과 한족 간의 다양한 문화사회적 갈등, 토착민과 이주민간의 충돌은 당나라 시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정변과 안사의 난(초기 주동자인 안녹산(安祿山)과 후기 지도자 사사명(史思明)의 성을 인용한 중국 역대 통일왕조 역사상 가장 대규모였던 반란)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되는 직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나라는 단순히 중국의 역사라기보다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차하는 역사적 단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러 민족 간의 상호작용과 영향력을 고려하여 이야기를 바라보면 더욱 풍부한 역사적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인데, 그릇된 시각으로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을 갖는다면 스스로의 논리왜곡에 따라 편협의 강으로 매몰되는 우를 범하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는, 역사왜곡에 몰두하는 중국이 가장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당나라 건국 초기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당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696년 돌궐은 거란과 대립하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90~705)를 지원하며 강력한 세력이었던 거란을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격퇴하기도 한다. 또한, 698년 당나라를 정벌하여 양쯔강에서 화북평원華北平原 동부에 있는 산둥반도山東半島까지 상당한 지역을 폐허로 만들기도 한다. 이후 서쪽으로 이동한 투르크족은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져 오늘날 튀르키예까지 이어진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추어 섰음에도 그가 품은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앙카라 여행중 ‘칸카르데쉬’란 단어로 시작한 궁금증은 동북아 고대사로 이어진다.


투르크족은 어떻게 몽골 초원에서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이동했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의문이지만 사실 이 의문은 그들이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해소된다. 유목민족은 초원을 따라 어디든 이동하는 민족이다. 말을 타고 가축을 키우며 초원에서 살아가는 기마 유목민족들의 이동거리 개념으론 어찌 보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13세기엔 징기스칸의 몽골족 세력이 유럽까지 진출한 적도 있지 아니한가.


돌궐족이 유연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유연과 동맹이었던 고구려는 돌궐과 대립 관계였다. 유연이 멸망된 후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618년 당나라 건국 이후 사정이 달라진다. 돌궐은 당나라 견제를 위하여 고구려와 동맹을 원했고, 고구려도 같은 이유에서 돌궐과의 형제 맹약의 동맹을 맺게 된다. 당나라의 북방 견제와 이간책으로 동서로 분열된 돌궐족으로선 정치적, 전략적 동맹관계가 절실하였을 것이다.


몽골의 오르혼 계곡에 남아있는 돌궐의 오르혼 비문(Orkhon inscriptions)엔 고구려 Čölüg와의 형제 맹약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문에는 모략과 이간질에 이골이 난 당시 당나라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돌궐의 왕이 죽었을 때 조문 사신을 파견했던 고구려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다. 결국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인 투르크족에 의하여 유럽에도 알려지게 되고, 동로마 제국의 문서에도 투르크족이 전하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 오늘날 한국을 코레(코리아)로 부르게 된 근거가 된다.


이 오르한 비문의 기록은 국력과 주변 정세에 따라 달라지는,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국제관계에 따라 당나라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필요성이 반영된 동맹 관계였음이 분명한 일이다.


튀르키예가 우리를 형제 나라로 여기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이유는 오르한 비문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었다. 고구려를 의미하는 Čölüg를 기억하고 우리를 Kore라 부르는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새까맣게 잊고 사는데, 투르크족의 후손인 튀르키예는 약 1400년 이전의 이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고 칸카르데쉬, 즉 ‘형제의 맹약’, ‘형제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투르크족의 후손인 오늘날 튀르키예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에 속한다. 어순이 같고 모음조화 등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는 말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튀르키예어를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에 의하면, 튀르키예어엔 우리말과 상당히 유사한 단어와 쓰임이 비슷한 말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어쩌면 과거 오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그들의 조상과 함께 북방에서 말을 달리며 뒤섞여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싶다.


튀르키예어 '칸카르데쉬 Kan Kardesh'는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이다. 튀르키예 속담에 '피를 흘리지 않은 땅은 조국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사실 튀르키예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어떤 전과를 올리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국공원에서 본 이 들의 희생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고 참전한 인원만 보더라도 3만명이 훌쩍 넘는 숫자였다. 이 사실도 이곳 한국공원에서 새삼 알게 된 그였다. 당시 한국전 참전이 곧 조국을 지키는 일이라 여긴 튀르키예에선 지나치게 많은 파병 지원으로 제비뽑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을 한 참전용사를 코렐리 Koreli,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온 용사의 집을 ‘코렐리의 집’으로 부르며 매우 영예스럽게 생각하는 튀르키예 사람들, 오늘날에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용사의 자식들은 가게의 상호를 Koreli라 내걸고 생업을 이어가며 매우 영예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왼쪽 유럽지구엔 'Kore Şehitleri Cd.'라는 ‘코레’를 붙인 거리가 있다. 그들이 한국에서 흘린 피는 그들의 또 다른 조국이었고 형제였던 셈이었다. 우리로선 한 번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튀르키예와의 또 한 번의 인연은 2002년 월드컵 3, 4위전에서이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보았던, 너무나도 가난했던 한국이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것 만도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라 여겼는데,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워했다 한다. 당시 튀르키예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트컵 본선에 진출하여 3, 4위전에서 한국과 맞붙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응원석에서 튀르키예 국기인 월성기(Ay yıldız, 아이 이을드즈)가 펼쳐지자 온 튀르키예 국민들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솔직히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이때 튀르키예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고 호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앙카라에서 한국공원을 방문한 후에야 튀르키예인들이 한국 땅에서 흘린 피에 대해 그간 너무나도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깊은 사유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2010년 SBS에서 방영한 ‘칸카르데쉬, 이슬람에서 온 전사들’ 예고 영상과 춘천MBC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 (Kore Ayla)’를 공유한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761793

https://youtu.be/VQ2hbrhqp5Y


역사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기 쉬운 인류의 변천과 흥망성쇠의 과정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후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게 전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역사의 한 분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칸카르데쉬 코리!’라는 말로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튀르키예의 역사교육은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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