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바삭한데 현실은 늘 버석했다
더러더러 인생사가 힘들게 느껴질 때가 분명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늘 한결같지 않았다. 일시적인 감정의 기복일 때도 있었지만, 제법 길게 기복이 이어지는 지속적인 감정일 경우도 있었다. 마치 구불구불 이어진 길처럼 그렇게 굴곡진 길을 걷는 것이 다름 아닌 인생살이였다. 그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어떤 날은 갑작스레 견딜 수 없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럴 때마다 가방을 싸서 훌훌 털고, “가자!”라고 말하며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나마 나쁘지 않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이었고, 현실은 늘 고르지 못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였다. 이런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그였다. 한마디로 살아야 한다는, 누가 뭐라 해도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꾹꾹 눌러 또박또박 쓰고 있는 셈이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문제이니까.
실타래가 마구 엉켜 있는 듯한 대부분 소시민의 인생살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뒤치기나 업어치기를 할 수 있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촘촘하게 교차되어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빈틈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씨줄과 날줄이 질서를 잃었다. 사람들과의 소통 부족이나 원활하지 못한 소통에서 오는 혼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업에서 물러난 처지에 업무적인 역할 분담의 모호성이나 소외감 같은 것에서 비롯된 혼란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도 배우자를 잃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질서를 잃다 보니 조화까지 무너져 내렸다. 예측 불가능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갑작스레 닥친 새로운 상황이었다. 그간 알콩달콩 살진 못했어도 배우자 없이 사는 세상을 상상조차 못 했던 생경한 현실이었다. 그러한 당황스러운 낯선 상황에 대한 대응이 쉽지 않음을 예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그였기에 더욱 빠르게 조화까지 무너져 내린 것이라 봐야 마땅하지 싶다.
인간의 삶 속에서 사별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마주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부간의 사별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게 정상이다. 대부분 그저 막연한 일로 여기고 살아간다. 준비할 수 있는 사별이 얼마나 있겠는가? 준비한다고 뭐가 크게 다르겠는가?
인간은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어떤 식으로든 차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삶의 복잡성과 변화무쌍함 속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사별이라는 현실을 너무 크게 생각하거나 감정에 휩싸이기보다는 무심코 지나가거나 애써 외면하고 미루어 두는 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사별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사별에 대한 정서적인 충격은 예상치 못한 것이며, 이에 대한 대비가 불가능하다. 준비한다고 해서 그 현실이나 감정의 파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계속하고, 가족과의 연결을 중시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이론은 바삭한데 현실은 늘 버석했다.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그렇게 황망하게 그의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된 아내가 보고 싶다. 돌이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인데, 자식들이나 가족 간 대화 끝에 마음 상하여 심란해질 땐 더욱 그렇다. 예전엔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근거 없는 자신감도 꽤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뚝뚝 떨어질 때 또한 그렇다. 느닷없이 문득문득 떠오를 땐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고립감이 몰려와 자존감이 해제되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나가듯 존재감 또한 무기력하게 이탈된다. 그렇게 해제되고 이탈되어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더더욱 아내가 보고 싶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꽤나 많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살았지 싶다. 익어가고 싶은데 맘대로 익어지지 않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늙음으로 해 두자.
그는 아내 없이 사는 삶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 걸 준비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누구에게나 언젠가 닥칠 일이기도 한 아내와 사별이었지만, 60을 코 앞에 두고 아내가 떠난 사실은 구멍 뚫린 문풍지로 통바람이 들어오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웠고, 해가 쨍쨍한 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만큼이나 느닷없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익숙해질 수 없는 일중 하나이지 싶다. 황망스러웠던 당시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그렇게 느닷없고 을씨년스러울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생경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버겁게 느껴지는 상대와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샅바 싸움을 하고 있는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옴치고 뛸 수 없는, 별도리가 없지 싶은 무기력이 느껴질 때도 있는 골리앗 같은 상대였다. 늘 다윗일 수 없는 들쭉날쭉한 삶엔 돌파구도 여의치 않았고, 그렇다고 뾰족한 비상구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삶이 이리도 지랄 맞은데, 새해 벽두부터 세상이 너무나 시끄럽다. 동서남북 늘 시끄럽고 심란한 세상이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싶다가도 골이 깊은 분쟁과 대립,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전쟁에 지진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세월이 하 수상히 느껴지는 것이 그저 노파심이고 기우였으면 좋겠다. 너무 큰 바람일까?
기억,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추억이라 할 수 있겠다. 민수, 원철과 함께 투즈 귈 Tuz Gölü로 향할 때 보았던 끝도 없이 펼쳐지던 평원이 떠오른다.
속사정이야 시끄럽든 어떻든 풍경만큼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는데…,
그늘진 구김도 왜곡된 굴절도 없었는데…,
그랬다. 앙카라에서 지평선만 보며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투즈 귈 호수에 비친 세상은 그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호수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아름다운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심각한 불평등과 계층 간 갈등으로 인한 세상의 그늘진 구김과 왜곡된 굴절도 없었고, 정치적 분열과 대립 그리고 사회적 극단도 없었다. 현실과는 사뭇 다른 오롯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풍경만 그곳에 있었다.
“풍경이 삶이 되고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던 것 같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쏟아져 내린 투즈 귈 소금호수가 그려지며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치는 하 수상한 세월이고 평정을 찾지 못하는 심란한 그의 마음이었다.
그랬다. 그는 뜬금없이 튀르키예로 떠났다. 어느 날 갑자기 가방을 싸고 원철 민수에게 전화를 걸어 동행을 타진하였다. 동행이 없다면 혼자라도 떠날 생각이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다.’라고 달랑 글 한 줄 써 놓고.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갑갑함에서 탈출했던, 아니 탈출을 정당화했던 여행이었다. 비상구도 없어 보였고 탈출구도 없어 보였던, 늘 다윗일 수 없는 들쭉날쭉한 삶에 여행이라는 비상구를 찾았던 셈이다.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그렇게 찾은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따라 이스탄불로 들어가 앙카라를 빠져나가고 있는 그였다.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마지막 안식처 앙카라 아타튀르크 영묘 아니트카비르 Anitkabir를 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두 시간은 달렸지 싶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심란해지고 눈에 거슬리는 아파트도 없었고, 고층빌딩으로 가득 찬 복잡한 도심도 없었다. 그저 하늘과 땅만 있었다. 그곳엔 파란 하늘과 끝없이 평원으로 이어지는 비현실적인 풍경만 있었다. 보고 있는 눈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두고 ‘안구정화’라 하지 싶었다. 영혼까지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 했는데, 사실 부럽기까지 했던 악사라이 평원을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우리와 달리 참으로 땅이 넓은 튀르키예는 가는 곳마다 지형이 다르다. 다를 뿐만 아니라, 고산과 평원 해안과 사막지형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자연환경과 문화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땅이다. 로마, 비잔티움, 오스만 제국 등 옛 고대 사회의 문명지였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독특한 지리적 위치로 동서양의 문명이 교류되고 충돌되었던 역사적 다양성과 역동성이 공존하고 있는 땅이다.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여행하는 것은 그러한 튀르키예의 역사적 다양성과 역동성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특히 이스탄불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인 유적,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이 공존하는 튀르키예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산악 지형이었던 앙카라를 벗어나자마자 대평원이 이어진다. 가도 가도 끝도 없이 지평선이 이어지는 지형이 계속된다. 민수와 원철, 그리고 그는 그렇게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달려 투즈 귈 소금호수에 당도한다.
투즈 귈 Tuz Gölü의 Tuz는 소금, Gölü은 호수를 의미한다. 옛 지명은 타타호(그리스어 Τάττα, 라틴어: Tatta)라 불렸던 투즈 귈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소금호수, 염호(鹽湖) 정도이겠다. 여기에 지명을 덧붙인다면 알투글라 투즈 귈, 또는 알투글라 솔트레이크(Altuğlar Saltlake) 정도로 번역되면 무난할 것 같다. 실제 그들이 도착한 휴게소는 악사라이 Aksaray와 앙카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변에 있는 알투글라 솔트레이크 휴게소(Altuğlar Saltlake Dinlenme Tesisleri)였다.
휴게소는 소박하였지만 특별하였다. 평원 지역에 딱 알맞은 단층으로 지어진 요란하지 않은 휴게소였다. 호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건물 안에 설치하여 호수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는 그런 건물이었다. 구릉지와 평원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조망을 가리거나 방해하는 건축물이었다면, 그리 특별하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낮은 구릉지를 가리지 않게 지어진 건너편 휴게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방향에 거슬리지 않게 그저 낮게 지어진 휴게소 건물이 있었고,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지평선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투즈 귈의 파란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참으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거기다 때론 사막 같은 하얀 소금밭으로 때론 핑크빛으로 변한다는 호수였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 풍경이겠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런 비현실적인 풍경과 끝도 보이지 않는 파란 소금호수를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선사 시대의 타타호는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으로 수많은 강줄기가 이어지는 훨씬 더 큰 담수호였고 주변은 초목이 무성한 초원 지대였지만, 11,000년에서 5,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이후 점차 현재의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소금호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다고 이 땅이 과거 오래전에 바다여서 지각변동으로 거대한 산이 융기될 때 바닷물이 함께 올라와 분지에 갇힌 형태의 호수로 보기엔 주변 지형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높은 산은 고사하고 작은 동산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로 두 시간을 달려도 지평선만 이어지는 대평원 지형이다. 원래 바다였지만 태평양 동쪽 해양 지각판인 나즈카 판과 남미 대륙판이 부딪쳐 바닷속에 있던 땅이 해수면 위로 융기되어 안데스산맥을 형성하며 거대한 내해가 된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처럼 지각변동에 의하여 생긴 소금호수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선사시대 때 Tatta호로 불린 투즈 귈이 수많은 강줄기가 이어지는 훨씬 더 큰 담수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융기보다는 단층이나 습곡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분지에 물이 고이고, 사방에서 나트륨과 염소 이온이 공급된 상태에서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거듭된 증발과 퇴적이 반복되어 암염이 생기며 소금호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이 머문 휴게소 북쪽 가까이 히타이트 제국의 서부경계를 이루었던, 아나톨리아반도를 동서로 흐르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긴 1,355㎞의 큰 강, 크질이르마크(Kızılırmak Nehri, 크즐르막, 붉은 강)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지역은 과거 히타이트족과 아나톨리아인의 초기 문명 발생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투즈 귈 소금호수와 크질이르마크 강은 이들에겐 생명의 젖줄이었을 것이고 특히, 소금은 문명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매우 귀중한 물질로 금의 무게와 가치가 거의 동등했었다. 오늘날 ‘급여’를 의미하는 ‘salary’는 ‘소금으로 대가를 지불한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살라리움 salarium에서 비롯되었다. 그만큼 소금이 과거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실크로드 대상들의 주요 무역거래 품목이기도 하였고, 때론 무기로 때론 화폐의 역할까지 한 소금은 인류의 모든 문명에서 주축을 이루는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암석이다.
투즈 귈은 표면적이 1,665㎢이다. 서울 면적(605㎢)의 약 3배, 제주도 면적 1,850㎢ 보다 조금 작은 엄청나게 큰 소금 호수이다. 앙카라에서 약 150㎞, 버스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튀르키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고염수 호수로 알려져 있는 호수다. 위성사진을 보면 규모는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염도의 단위 1 퍼밀(‰)은 바닷물 1,000g 속에 1g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전 세계 바닷물의 염도는 약 35‰(3.5%) 정도인데, 투즈 귈의 염도는 바닷물의 약 10배에 달하는 324‰(32.4%) 고염수 염호인 셈이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호수는 Van Gölü로 튀르키예 동부 반 주(Van ili)에 있는 염호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근처에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한 지역이다. 이란과 이라크 접경 지역과 가까운, 성경에서 기록한 티크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근거로 추정하는 에덴동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투즈 귈은 4월에서 6월, 그리고 9월에서 10월 적당히 따듯한 날씨가 이어지면 핑크빛으로 변한다. 호수에 살고 있는 수중생물, 조류(藻類 Algae)가 이 시기에 개체수가 늘어나며 진한 분홍빛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반대로 7~8월에는 물이 증발하여 사막 같은 하얀 소금밭이 끝도 없이 드러난다.
그들이 방문한 12월, 겨울철엔 지중해성 기후로 비가 내리는 시기여서 조금은 수심이 깊어져 호수의 모습으로 바뀌고, 낮은 기온으로 조류가 번식하지 않아 핑크빛 호수는 볼 수 없었다. 이곳 호수와 주변 초원은 플라밍고(홍학) 중 가장 큰 Greater flamingo의 주요 번식지이기도 하다. 호수 입구에 세운 투즈 귈 문자 조형물에 붉은색의 Greater flamingo가 함께 조형되어 있다.
튀르키예 소금 수요의 약 60~65%를 공급하고 있는 투즈 귈은 바다로 이어지지 않는 분지 호수인데, 투즈 귈이 있는 알투글라 지역 강우량은 1년에 300㎜ 정도로 튀르키예에서도 가장 비가 적은 지역이다. 실제로 극심한 가뭄은 수천 마리의 플라밍고 떼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주로 염호나 소금기가 있는 갯벌에 서식하는 플라밍고에겐 환경변화에 따른 가뭄으로 호수 바닥이 드러나면 서식지가 없어지는 셈이기 때문에 날지 못하는 어린 새에겐 치명적이다.
푸른 하늘이 호수에 드리워져 눈이 부셔 바라보기도 쉽지 않은 푸른 빛깔을 띤 호수였다. 파란 하늘이 호수면에 비추어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하였다. 그렇게 끝도 보이지 않고 원금감도 없는 호수를 바라보며 발을 내디뎌 본다. 수심이 깊지 않았다. 그저 깊어야 발목 정도였다. 비가 내려야 할 시기임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평균수위 40㎝에도 못 미치는 정도였다. 더 깊이 멀리 들어가진 않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나 멀리 있는 사람이나 그저 발목이 찰까 말까 한 깊이였다. 발이야 젖든 말든 철벅거리며 호수를 걸어보는 그와 달리 원철은 발이 젖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호수로 들어오지 않고 물이 말라 드러난 소금밭을 오가며 어린아이 마냥 철벅거리고 호수를 돌아다니는 민수와 그를 지켜보았다.
물속에서 소금 결정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물론 이 경우에 비유할 수 없는 말이고,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 들었던 “반짝거리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은 황금도 소금도 아닌 지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 ‘황금’과 동등한 가치가 있었던 ‘소금’ 호수에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 가지를 모두 누리고 있는 셈이라 생각하며 투즈 귈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호수에서 인생샷을 건져 올리려는 모양이다. 수면 위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사진을 얻기엔 최적의 장소이지 싶다. 지형지물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투즈 귈에서는 원근감이 없어진다. 그저 호수와 하늘 그리고 수면 위의 나와 물속에 비친 온전한 자신의 모습만 반영된다. 단지 더 있다면 20여 년 함께 여행을 다니며 한 해 한 해 늙어가는 절친 민수와 원철이 있을 뿐이다.
투즈 귈에는 최근에 그나마 적게 내리는 비마저도 내리지 않았다. 마침 바람도 한 점 없는 날씨로 흔들림이 없는 수면은 반사되는 모든 사물을 굴절 없이 담아냈다. 거의 완벽한 반영(反影) 사진을 얻은 사람들의 표정엔 행복함이 가득 묻어나는 흡족함이 담겨 있었고, 그런 광경이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그에게는 굴절 없는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담아졌다.
여행을 하며 느낄 수 있는 충만함과 여행자만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인, 마음 저 편에서 올라오는 두근거림과 설렘을 투즈 귈에 남겨놓고 호수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휴게소로 돌아온다.
투즈 귈 소금은 입욕제로 사용할 수 있는 소금이다. 체내 노폐물 제거에 상당히 효과적이며, 투즈 귈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물론 소금비누, 올리브오일과 딸기향이 첨가된 솔트 바디 필링(salt body peeling), 암염과 암염으로 만든 조명기구 등 많은 관련 상품들과 빼곡히 진열된 기념품을 구경하고 버스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좀 더 여유 있다면 일몰 때까지 있으며 사진을 찍고 싶어 지는 그런 곳이다. 시간은 늘 제한되어 있고 항상 부족하다. 여행 중 시간은 더더욱 그렇고 아쉬움은 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여행 중 쉼표 또한 의미 있는 여행이다. 이따금 한 번씩 쉬어 가는 여행은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그들은 그렇게 40여분가량 머문 투즈 귈에 두근거림과 설렘, 그리고 아쉬움까지 보태어 남겨 놓고 다음 쉼표가 될 카파도키아 Kapadokya로 향한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아직 열려 있었고 여전히 유효한 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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