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판자로 지은 창고에 들어가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물렀다기보단 요즘 말로 "멍 때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얼기설기 덧대어진 판자 틈 사이로 빛줄기가 스며들며, 그 안에서 부유하는 먼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들어 빛줄기에 대어 보기도 하고, 판자 틈을 막아 보기도 하며 창고에 놓인 아버지의 물건들을 눈여겨본 기억은 특별한 시간의 틈이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았다면 그 틈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늘 존재하던 틈이지만, 빛줄기가 판자 틈 사이로 스며들었을 때야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순간, 그 공간이 단순한 틈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지닌 공간임을 깨달았다. 비록 어릴 적 창고에서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경험은 틈의 존재와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햇빛이 비추면서 실체를 드러내는 틈, 외부의 요소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나는 틈. 그것은 어린 시절 막연하게 알게 된 '틈'을 다시 꺼내어 보며, 오늘날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이 '틈'에 대한 고찰은 생각과 기억, 시간과 공간에 각각 다른 의미의 틈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나의 언어적 유희이자 여행이다.
"틈"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공간을 상징하며, 그 안에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 단어를 천천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여러 관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의 틈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틈"은 두 물체 사이의 작은 간격을 의미한다. 이 틈은 빛이 새어 들어오거나 공기가 통과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길이 된다. 틈은 견고함 속에서 취약함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벽의 갈라진 틈은 무너질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변화와 재구성을 촉진하는 기회로 변할 수 있다. 벽의 갈라진 틈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구조적 결함을 넘어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틈이 생기면 빛이 스며들어 새로운 밝음과 생기를 불러오며,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나고 환경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공간의 틈'이다. 이 틈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경계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공간적 틈은 자연과 인간, 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나는 판자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느꼈던 체험을 '공간의 틈'에서 잠시 머무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추상적 공간의 틈
추상적 공간의 틈은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심리적, 감정적, 또는 정신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의미한다. 이러한 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 내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정적 틈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거리감이나 이해의 공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대화에서 말하지 않은 감정이나 상처받은 마음속의 빈자리가 그 자체로 추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이 상처받은 마음속 빈자리, 추상적 공간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반대로 즐거웠던 감정이나 사랑하는 감정 또한 마음속에 추상적인 틈을 만들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꺼내어 보기도 한다. 이런 틈은 대개 감정의 소통이나 갈등을 통해 나타나며,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심리적 틈은 개인이 불안, 갈등, 공허감을 경험하는 동안 생기는 내적 공백이다. 이 틈은 자아의 상실이나 과거의 상처, 현재와 미래의 갈등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 틈은 자아 탐색이나 자기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며, 다양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계의 틈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틈이다. 이는 거리감을 상징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이해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여백이 될 수도 있다. 갈등과 오해에서 비롯된 관계의 틈은 이를 메우기 위한 노력 속에서 더 깊은 신뢰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추상적 공간의 틈은 지적 탐구나 예술에서도 나타난다. 문제 해결이나 창의적 사고에서 모호한 부분, 불확실성 역시 이 틈에 해당한다. 이러한 틈은 새로운 발견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며, 불완전한 정보나 이론을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지는 지적 전환점을 만든다. 예를 들어, 시인은 틈을 통해 무의식과 의식,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미술에서는 틈의 공간감이 작품의 깊이를 표현하거나 보는 이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시간의 틈
시간의 틈은 시간의 간격에서 느껴지는 정신적 여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일상에 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잃거나, 현재와 과거, 미래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간적 틈은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거나 미래에 대한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백처럼 "틈을 내다"는 의식적으로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놓치기 쉬운 '숨 쉬는 공간'을 확보하는 행위다. 이런 시간적 틈은 창조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상상력 속의 틈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도 추상적 공간의 틈은 존재한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와 현재 현실 사이에서, 또는 기존의 경험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이다. 이 틈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촉진하며, 예술적 표현이나 문학적 상상력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결국, 추상적 공간의 틈은 물리적 공간의 틈과 마찬가지로 변화와 성찰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틈 속에서 우리는 자아를 발견하고, 감정을 이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갈 수 있다.
틈의 철학적 의미
틈은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소 철학적이지만, 이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고 그 사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힘을 갖고 있다. 틈은 변화의 시작점이며 끝나지 않은 무엇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존재와 무(無) 사이의 틈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불확실성과 가능성을 상징할 수 있다. 틈은 결핍이 아니라 잠재력의 공간이고, 성장과 창조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틈을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약점이 될 수도 있고, 강점으로 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운동 시합에서 상대의 '틈'을 발견하면 그것은 약점이지만, 이 틈을 보강하여 강점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또 다른 기회가 된다.
인간은 사고, 기억, 시간, 상상이라는 긍정적인 뇌의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생각의 틈’, ‘기억의 틈’, ‘시간의 틈’은 그 자체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러한 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새롭게 바라보며, 더 나아가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나갈 수 있다.
여러분의 틈은 어떠하신지요?
@thebcstory
*이 사진은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에 남겨진 낙서와 ‘틈’, 사이에 박혀 있는 쇠붙이 도어 노브(door knob) 흔적이다. 정확하게 무슨 용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쇠붙이가 ‘틈’에 박혀 있는 모습이 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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