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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雪国

센다이(仙台)에서 시작된 이야기

by 조영환


설국 雪国


센다이(仙台)에서 시작된 이야기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센다이 공항(仙台空港)은 마치 겨울의 정수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눈 덮인 활주로와 맑게 갠 하늘의 푸른빛은 처음부터 나를 매혹했다. 기내의 문이 열리고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나는 마침내 일본의 동북부 땅을 밟았음을 실감했다.


센다이 공항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소박한 아늑함으로 내게 잔잔한 첫인상을 남겼다. 내부로 들어서자 일본 특유의 정갈함과 환대가 물씬 느껴졌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겨울의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분주한 국제공항과는 사뭇 다른, 마치 겨울이 만든 정지된 순간 속에 있는 듯한 공간이었다.


출입국 심사를 마친 뒤 짐을 찾으러 가는 동안, 나는 공항 곳곳을 둘러보며 흘끗흘끗 눈길을 주었다. 차분한 조명 아래, 깔끔하게 정돈된 안내판들과 직원들의 친절한 미소는 마치 따뜻한 온천물처럼 나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발견한 기념품 가게는 내게 센다이와 혼슈(本州) 섬 동북 지방의 문화를 미리 엿보게 했다. 찻잔에서 사케(日本酒), 그리고 팸플릿에 소개된 지역 특산 규탄(牛たん, 소 혀 요리, 우설)까지. 이 작은 공간은 지역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다. 아직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도, 나는 이미 센다이를 느끼고 있었다.



일본 국토는 네 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진 열도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여행을 준비하며 혼슈 동북부 지역에 대해 살펴보던 중, 일본 열도의 전체적인 구조를 잠시 이해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주요 섬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자.


홋카이도(北海道)는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섬으로,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사계절 아름답고, 우리에겐 아시아 최초의 동계올림픽이었던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하코다테는 홋카이도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의 고료카쿠 공원은 1868년 보신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우고 일본을 통치한 시기인 에도시대(1603~1868년) 말기에 신정부군과 막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며 일본 근대화의 길이 열리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특히 아름다운 항구와 야경으로 유명하며, 하코다테 산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일본 3대 야경 중 하나로 꼽히는 도시다.


혼슈(本州)는 일본에서 가장 큰 섬으로, 지금의 수도인 도쿄와 과거 수도였던 천년고도 교토, 그리고 하코네, 오사카 같은 주요 도시들이 위치해 있다. 필자의 여행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대부분의 도시가 혼슈섬에 있는 셈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여전히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일본 전국시대 등 격변기를 겪어온 역사적인 도시들이 혼슈에 있다.


규슈(九州)는 일본의 남서부에 위치한 섬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후쿠오카, 1945년 8월 9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가사키, 세계에서 가장 큰 칼데라 화산인 아소산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구마모토가 위치한 활화산이 많은 섬이다. 나가사키는 오늘날 평화공원과 원폭 전시자료관 등이 세워지며 평화와 재건의 상징이 되었다. 구마모토 성은 일본의 3대 성 중 하나로, 벚꽃 명소와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하이킹, 전통적인 일본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시코쿠(四国)는 일본의 남동부에 위치한 섬으로, 가장 작은 주요 섬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적인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쿠시마, 마쓰야마, 고치와 같은 도시들이 있다. 도쿠시마의 아와오도리 축제는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 민속춤 축제로 유명하다. 이 축제 기간인 매년 8월 12일부터 15일 까지는 도시가 온통 민속춤으로 들썩이는 축제의 장이 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인 도고온천과 귤과 도미요리로 유명한 마쓰야마, 가츠라하마 해변에서 태평양의 멋진 풍경을 즐기며 히로메 전통시장에서 소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고치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공항 대합실의 큰 창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겨울의 침묵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눈은 완전한 평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비행기가 천천히 이륙하고 착륙하는 모습은 이 고요한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치 예술적인 연출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시간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대기 중인 전세버스를 타고 이나와시로마치(猪苗代町)로 향했다. 버스 안은 포근할 정도로 따뜻했고,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마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차창 너머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더 깊은 겨울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산간도로를 따라 올라갈수록 눈은 더욱 깊어졌고, 도로 옆으로는 도톰하게 쌓인 눈더미가 끝없이 이어졌다. 세상은 온통 흰빛으로 덮여 있었고, 나무들은 눈의 무게를 이고 고요히 서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国)’이 떠올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그 첫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당시에는 책 속의 설국이 어떤 모습일지, 우리나라의 겨울 풍경과 어떻게 다를지, 혹은 어떤 감정을 품게 만드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뭔지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암회색 표지 위에 쓰인 ‘설국’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호기심으로 구입했던 그 책은 한동안 통속적인 이야기 정도로만 남아 있었고, 이후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힌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첫 문장이 문득 떠오르니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한 일이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 눈부신 설국의 풍경은, 그때 어설프게 상상하던 설국의 세계를 눈앞에 생생히 펼쳐 보이는 듯했다. 마치 책 속의 문장이 풍경을 타고 현실로 스며든 기분이었다.


책 속에서 가와바타가 묘사한 그 고독하고도 서정적인 공간, 무언가 말을 걸듯 살아 있는 설국의 자연은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 고요하고 깨끗하게 만든 이 풍경 속에서, 나는 시간조차 멈춘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버스가 천천히 굽이굽이 도로를 따라 움직일 때마다, 창밖의 설경은 마치 눈앞에서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서서히 펼쳐졌다. 눈 덮인 산간도로를 달려 설국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와바타의 글귀가 그랬던 것처럼, 이 풍경도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눈 덮인 공간 속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고독, 평화, 그리고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이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며, 오래전 읽었던 문학 속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나는 그 책이 전하려던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국은 단순히 눈 내리는 땅이 아니라, 그 눈 속에 깃든 시간과 정서, 그리고 자연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작은 존재감을 여과 없이 담아내는 순수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설국, 순수의 공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설국의 첫 문장을 되새김질을 하며 그렇게 순수의 공간, 설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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