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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에서의 하루

전통이 빚어낸 치유, 료칸과 가이세키

by 조영환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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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에서의 하루 

전통이 빚어낸 치유, 료칸과 가이세키


겨울 아침,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전세버스를 타고 이나와시로마치(猪苗代町)로 향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설경은 마치 흰 캔버스 위에 자연이 그려낸 그림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눈밭과 하얗게 뒤덮인 산자락은 ‘설국’ 속 풍경처럼 나를 압도했다. 이나와시로마치는 눈 덮인 동화 마을 같았고, 그곳에서 마주한 겨울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선사했다. 산간도로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고, 도로 위에서는 제설 차량과 사람들이 분주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곳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리고 그 혹독함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얼마나 부지런히 이어져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버스는 천천히 눈 덮인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도로 옆으로 펼쳐진 하얀 설산과 가끔씩 드러나는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의 파란 물빛은 나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눈이 가득 덮인 작은 마을은 나뭇가지마다 눈의 무게를 이고 휘어진 채 고요히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묵직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도로에는 용천수가 흘러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곳도 있었는데, 이는 반다이산(磐梯山) 일대의 활발한 지열 활동과 풍부한 온천 자원이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로움이었다. 과거 화산 폭발로 형성된 이 지역은 뜨거운 온천수가 곳곳에서 솟아나 겨울철 도로의 눈을 녹이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반다이산의 화산 활동은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를 비롯해 다섯 개 이상의 크고 작은 호수를 탄생시켰으며, 이 호수들은 설경과 함께 어우러져 이 지역을 더욱 아름답고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나와시로 호수와 같이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구조호(構造湖)로 지질학적으로 '칼데라 호수'라고 한다. 칼데라 호수는 화산 폭발 후 함몰된 분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된다. 예를 들어, 후지산 주변의 호수들도 비슷한 과정으로 형성되었다. 864년 후지산 분화 때 북서쪽 산허리에서 빠져나간 용암이 세노우미라는 호수에 유입되면서 오늘날의 후지 5호, 가와구치 호(河口湖), 모토스 호(本栖湖), 사이 호(西湖), 쇼지 호(精進湖), 야마나카 호(山中湖)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호수들은 용암류에 의해 골짜기나 하천이 막혀 생긴 것으로, 화산 활동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질학적 특징이다. 이나와시로 호수는 ‘천국의 거울’로 알려진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 해발 514m의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해가 땅거미에 걸치자 우리는 오늘 밤 묵을 료칸(旅館)으로 향했다. 버스는 이나와시로 호수를 끼고 11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24번 지방도로를 타고 아다타라산(安達太良山) 서쪽 산자락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나카노사와 온천(中ノ沢温泉) 지역에 위치한 白城屋旅館(しろきやりょかん, Ryokanshiro Hotel)이었다.


료칸에 도착하자 눈 덮인 마을의 고요하고 차분한 풍경이 마치 오래된 그림 속으로 나를 초대하는 듯했다. 짐을 풀고 들어간 다다미 방은 전형적인 일본식 방으로, 정갈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다미 위에 가지런히 깔린 하얀 이부자리는 마치 첫눈처럼 깨끗했고, 방 안은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는 일본 미학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벽에는 은은한 색감의 산수화 족자가 걸려 있어 방 전체에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더했고, 미닫이문과 창호지 문 너머로는 하얗게 눈에 덮인 마을이 마치 액자 속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전통적인 요소들 사이로 현대적인 알루미늄 새시 창틀이 살짝 눈에 띄었지만, 그것조차도 이곳의 오랜 전통과 현재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일본의 정서를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고, 그 차분한 공간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며 먼 길의 피로를 녹여주었다. 료칸의 다다미 방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전통, 그리고 순수의 고요함이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国) 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답답하고 복잡한 도쿄를 떠나 료칸으로 향하던 그의 심정은 어쩌면 나와 닮아 있지 않았을까?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눈 덮인 산골 마을의 고요한 공간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분이랄까. 도쿄의 소음과 빠른 삶의 속도를 뒤로한 채, 눈 속에 고요히 자리한 설국의 료칸을 찾아온 주인공에게 어쩌면 이곳은 삶의 단순함과 단조로움이 역설적으로 행복임을 일깨워주는 낙원일 수도 있지 싶었다. 방 안의 적막은 외로움이 아니라 위안이었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도심의 복잡다단한 삶은 마치 먼 옛날의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자연의 숨결이 깃든 이 공간은 비로소 나에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 일정을 잘못 짰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도쿄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오는 일정으로 여행하는 것이 ‘설국’의 느낌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일정이지 싶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유카다로 갈아입은 후 료칸 식당으로 내려가 첫 번째 정식 식사를 했다. 일본식 가이세키 요리(会席料理)로 구성된 식사는 밥과 국, 회, 그리고 조그만 접시에 담긴 다양한 반찬들로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음식은 대체로 담백하고 살짝 단맛이 도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지역에서 재배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가 많아 건강한 느낌이었다. 나이 지긋한 여관 주인의 모습에서 정성과 환대가 묻어났다. 그녀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보온밥통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절을 한 후, 정성스레 밥을 떠 상에 올려주었다. 가족이 운영하는 듯한 이곳의 따뜻한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 


저녁 식사 후, 기대에 부풀어 노천탕으로 향했다. 료칸의 자랑거리인 이 온천은 강산성 유황 온천수로,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수건 하나만을 걸친 채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온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온천수에 발끝부터 천천히 몸을 담그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차갑고 뜨거운 감각이 교차하며 피부를 자극했고, 점차 온기에 적응하며 몸 전체가 포근히 감싸였다. 온천수 특유의 유황 향이 코끝을 스치고, 물속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눈 덮인 설산이 달빛에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문득, 이 순간이 마치 손안에 담긴 작은 별빛처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맡긴 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묘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온천수가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는 동안, 그동안 쌓였던 일상의 피로가 물방울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했다. 잦은 출장과 업무의 연속으로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대신 깊은 평온함이 몸과 마음을 채워갔다. 때때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은은한 달빛이 어우러져 작은 협주곡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온천에 푹 빠져 있다 문득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진 것을 발견하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온천에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맡기며 걸어가는 동안에도, 온천이 선사한 따스함과 평온함은 마치 마음 깊숙이 스며든 햇살처럼 내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흔히 하는 목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이곳의 순수한 자연과 료칸이 지켜온 고즈넉한 일본 전통이 내 몸과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전통 관습이,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에 쌓인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부드럽게 녹여내는 치유의 방식임을 깨닫게 해 준 순간이기도 했다. 설국에 나오는 주인공도 이러한 기분을 느꼈을까.


이나와시로마치는 북쪽의 반다이산(磐梯山)과 남쪽의 이나와시로 호수 사이에 자리한 산악 분지다. 지열로 인해 풍부한 온천 자원을 자랑하며, 이곳은 겨울철 설경과 스키, 그리고 온천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하루 종일 눈 속에서 느낀 고요함과 따뜻한 환대, 일본 전통의 정식인 가이세키 요리와 노천온천 문화는 나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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