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복의 땅, 후쿠시마

설국을 빠져나와 닛코로

by 조영환

[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회복의 땅, 후쿠시마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어제 일행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겸해 사케를 한 잔씩 나누고 노천 온천을 즐긴 덕분일까, 아침 기상은 더없이 개운했다. 어젯밤 노천 온천에서 느꼈던 따스함이 아직도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듯했다. 후쿠시마에서 맞이한 새로운 날, 따스한 오늘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식당에는 정갈하고 질서 정연하게 차려진 가이세키 조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시루(味噌汁)의 따뜻한 향이 공기를 타고 내게 전해졌다. 식당을 감싸는 이 된장국의 은은한 향은 어쩐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안정감을 주었다. 삶은 계란, 샐러드, 밥과 함께 어우러진 아침 식탁은 낯선 곳을 여행하는 나에게 따스한 위로와 편안함을 선사했다. 일본 가정에서 매일 아침을 여는 미소시루처럼, 이곳의 아침도 마치 오래된 일상의 일부처럼 나를 감싸주었다.


20070110072500.JPG


어느 나라든 식사 때마다 함께 나오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일본에선 미소시루가 그랬다. 일본의 전통적인 식문화에서 늘 함께하는 국물 요리 미소시루, 우리가 흔히 미소 된장국이라 부르는 그 미소시루는 일본 가정의 일상과 깊이 연결된 전통적인 국물 요리로, 아침 식사와 함께 늘 소반에 오르는 평범한 음식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순간을 상징하며, 계절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만들어진다. 그 맛과 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해 준다. 일본인들에게 미소시루는 단순히 늘 먹는 일상적인 음식을 넘어 정서적 안정과 위안을 주는 은은함이 담겨있는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네 가정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맛과 향은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의 미소시루 또한 그렇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우리네의 콩나물국이나 된장국(찌개) 같은 음식이지 싶다.


9시가 되어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났다. 마을의 도로는 밤새 내린 눈으로 다시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도로 양쪽으로 치워진 눈더미는 산처럼 높았고, 일본 특유의 풍미가 느껴지는 봉긋봉긋 다듬어진 소나무 가지에도 이미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차량이며 건물이며 모든 것이 눈으로 덮인 나카노사와 온천 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잠시 멈췄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또다시 순백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폭설의 불편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오래전부터 터득해 온 듯했다. 도로는 금세 치워졌고, 마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이어갔다. 이방인인 내가 느끼기에 이 풍경은 아름답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삶의 일부일 뿐이었다. 태연하고 여유로움까지 보이는 이곳 사람들 덕에 여행자의 불안감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따스한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버스는 마을을 빠져나와 어제 들어왔던 산길을 되짚어 나갔다. 설국의 경계는 의외로 선명했다. 하얀 눈으로 가득 찬 산길을 넘어 도로가 열리자, 갑작스레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멀리 보이는 반다이산의 설경은 더욱 빛을 발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설국의 첫 문장을 뒤집어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비로소 나는 설국을 빠져나와 닛코로 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20070110094501.JPG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那須高原サービスエリア(Nasukogen Service Area)에 도착했다. 음식 가판대에서 아유 시오야키(あゆの塩焼き, 은어 소금구이)를 광고하는 배너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빨간 우체통과 전화 부스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주변의 나무들은 자연의 싱그러움을 더해주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이 느껴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닛코로 향하는 길목, 이곳은 여행자에게 소소한 안식을 선사했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평범한 광경 같았지만, 왠지 모를 평온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닛코로 가는 길이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북쪽의 홋가이도에서 남쪽의 오키나와현까지 총 47개의 도도후켄(都道府県, とどうふけん, 도도부현)으로 구분되어 있다. 나는 어제 미야기현의 현청 소재지이고, 도호쿠 지방의 중심지인 센다이시(仙台市)에서 출발하여 후쿠시마현 이나와시로마치(猪苗代町)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오늘 간사이지방 도치기현의 닛코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 남북을 잇는 가장 긴 고속도로 도호쿠 고속도로(東北自動車道, Tōhoku Jidōsha-dō, 679.5km(422.2마일)를 타고 닛코로 이동 중이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은 여전히 설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여행객을 따라오고 있었다.


후쿠시마는 일본 도호쿠 지방에 위치한 현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자랑하는 땅이다. 반다이산과 이나와시로 호수, 그리고 고시키누마(五色沼)는 이 지역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고시키누마(五色沼)는 그 이름처럼 계절마다 빛나는 색이 달라지는 신비로운 곳이다. 크고 작은 30여 개의 늪이 모여 있는 반다이 지역의 하이킹 코스로, 에메랄드그린과 코발트블루가 어우러진 신비로운 색감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명소다. 후쿠시마의 고시키누마는 자연의 치유력을 상징하듯 빛나고 있었다. 푸른 물결 속에서 반짝이는 빛은 마치 이 땅이 품고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은 마치 자연이 주는 위로와도 같았다.


이나와시로마치의 호수, 나카노사 온천지구와 반다이산 고시키누마를 비롯한 후쿠시마는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약 1시간 30분 남짓 거리에 위치해 있어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도쿄에서 당일치기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자연의 아름다움 뒤에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INES) 7단계로 분류된 최악의 원전 사고로, 방사능 유출은 후쿠시마와 일본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날 이후, 이곳은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후쿠시마는 멈추지 않았다. 복구와 재건의 과정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살아가고, 회복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는 여정이었다. 일본 문학에서도 후쿠시마의 이야기는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았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부흥서점(復興書店)’을 설립해 재난 문학을 통해 후쿠시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알렸다. 재난의 진실을 전하고, 아픔을 치유하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문학적 기원이 그 중심에 있었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부흥서점’에 모인 작품들은 단순히 재난의 기록이 아닌, 고통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는 문학적 기념비와도 같았다. 후쿠시마를 이야기하는 문학은 아픔을 기억하되, 희망과 재생으로 향하는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category=Research&m201_id=10038797


후쿠시마의 역사는 고통뿐 아니라 영광과 함께 특유의 문화유산도 품고 있다. 후쿠시마의 역사적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일본의 에도 막부를 세운 첫 번째 쇼군이다. 필자의 오늘 목적지인 닛코 동조궁에 그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다. 닛코 동조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신사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의 아이즈 와카마츠는 사무라이 정신의 중심지로, 사무라이 문화와 관련이 깊은 도시이며, 에도 막부의 세력과 교토고쇼(京都御所, 교토어소,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1869)까지 역대 천황이 주거한 교토 황궁)에 정치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세력과의 싸움으로, 일어난 내전인 보신전쟁(戊辰戦争, 1868년~1869년)의 전흔을 간직한 도시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츠루가 성(鶴ヶ城)은 사무라이의 충성과 명예를 상징하며,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무라이 저택과 축제를 통해 사라지지 않은 사무라이 전통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부시도(武士道)의 가치는 후쿠시마의 과거를 넘어,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산이다.


후쿠시마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로 인해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여행지로, 일본의 다양한 매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후쿠시마, 나는 이곳이 단순히 아픈 기억의 장소로만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설국처럼 눈부신 자연과 회복의 의지를 가진 이 땅이, 고통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과거와 오늘을 품고 더 밝은 내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멀리 보이는 설산은 마치 이 여정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듯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순백의 봉우리들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채 희망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 덮인 산줄기를 보며 나는 속으로 기원했다. 이 땅이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따스한 빛으로 남기를.

@thebcstory

#일본여행 #후쿠시마 #부시도 #도쿠가와이에야스 #닛코 #동조궁 #미소시루 #鶴ヶ城 #徳川家康 #도도후켄 #고시키누마 #五色沼 #반다이산 #이나와시로호수 #武士道


Copyright 2025. Cho younghwahn All rights reserved.


keyword
이전 04화설국에서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