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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공간, 설국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

by 조영환 Feb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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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의 풍경은 한없이 고요해졌다. 멀리 보이는 설산과 점점 가까워지는 푸른 호수는 내가 상상했던 겨울의 모습 그대로였다.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이나와시로마치에서 방문한 가라스관(世界ガラス館, 세계 유리제품관)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영어 단어 Glass를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 ‘가라스’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세대가 일본어를 사용했던 영향으로 비교적 익숙하지만, 영어에 더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는 ‘가라스’보다 ‘Glass’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 같았다. 유리제품관, ‘World Glass Museum’이라 불리는 이곳의 이름 ‘가라스’는 ‘Glass’를 가타카나 ‘ガラス’ (가라스)로 표기한 것이다.


과거 우리는 한때 언어 주권을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창씨개명을 강요받고, 내선일체를 내세운 억압 속에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러한 경험은 정부 수립 이후 이념 대립의 시기를 거치며 일본 문화와 언어를 금기시하는 풍토로 이어졌다. 1950~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일본과 그 문화를 제대로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요즘 손주들의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와 언어를 접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과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고,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참으로 좋은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가라스관 안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입된 유리 공예품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2~3,000엔짜리의 작은 소품, 장식품, 그리고 실용적인 유리 제품부터 2~3만 엔에 달하는 고가의 유리 공예품까지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장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유리 미술관에 온 느낌이랄까. 전시장 내부가 온갖 빛깔로 가득했다. 예술작품으로 봐도 될 만한 유리공예 작품들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 오리와 여러 모양의 새, 추상적인 모습의 크고 작은 작품들과 물병, 화병, 주전자, 찻잔, 크리스털 와인잔과 컵, 천장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까지 실용적인 유리제품들로 가득한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오색빛깔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유리궁전 같은 곳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디자인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상적인 곳이었다. 


나는 유리 불기 체험을 통해, 뜨거운 열기로 만들어지는 투명한 작품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지 느낄 수 있었다. 유리라는 매개체는 겨울의 맑고 차가운 공기와도 닮아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든 작은 유리 조각은 이후 여행 내내 내 가방 안에 담긴, 겨울의 조각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라스관을 둘러본 뒤 우리는 호숫가에 있는 나가하마(長浜)로 향했다. 이곳은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여름철에는 유람선이 호수 위를 떠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에는 유람선 운항이 중단되어 백조와 거북이 형상의 유람선이 눈을 뒤집어쓴 채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대신 호숫가에는 백조와 청둥오리 같은 겨울 철새들이 떼 지어 놀고 있었다. 새들은 무리를 지어 물 위를 떠다녔고, 군무를 펼치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텃새가 된 철새들의 모습은 사진 찍기 좋았지만, 자연 속에서 야생성을 잃은 모습이 어딘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나와시로 호수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그려낸 걸작이었다. 눈 덮인 설산이 호수 위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물은 거울처럼 고요히 그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겨울 철새들이 가득했다. 저마다의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 눈 덮인 설산과 호수는 마치 자연의 오케스트라처럼 느껴졌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곡진히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눈길을 걸으며 설산과 호수, 그리고 이곳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철새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발아래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겨울의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였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그 순간은 전혀 춥지 않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함과 평온함이 나를 감쌌다. 대자연이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이 광경 앞에서, 나는 작고도 미약한 존재로서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연의 손길로 완성된 것이었다.


눈이 내린 후라 하늘이 흐렸다. 맑은 하늘이었다면 호수 위로 설산의 그림자가 내려앉았을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그 순간을 기록했지만 호수에 비친 설산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에 잠시 서운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날씨가 좋아 사진에 담았다 한들 그것이 충분치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감동은 렌즈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 새겨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이나와시로 호수의 풍경을 떠올린다. 날은 흐렸지만 설국, 순수의 공간 한가운데에 있었던 느낌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그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철새들, 그리고 대자연의 웅장함 속에서 느꼈던 나의 작은 존재감까지. 그날의 겨울은 나에게 단순히 추운 계절이 아니라, 삶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가르쳐 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그 호숫가에 서서, 설산이 비친 호수의 고요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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