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네 국립공원 (Hakone National Park, 箱根国立公園)
하코네 원숭이의 천국 지코쿠다니(地獄谷)
고라에서 오와쿠다니까지, 유황의 냄새 속에서 떠오른 것들
하코네 국립공원 (Hakone National Park, 箱根国立公園), 오와쿠다니(O-waku-dani, 大涌谷) 유황계곡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유황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온천의 따스함이 몸에서 천천히 식어갈 즈음, 나는 다시 하코네 등산 철도에 올랐다. 고라(Gōra)까지 가는 길은 급경사의 산길을 따라 오른다. 열차는 커브를 돌 때마다 방향을 바꾸고, 산속을 오를수록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점점 깊어진다. 창밖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전철의 느릿한 리듬에 맞춰 사색도 깊어졌다.
고라는 하코네의 또 다른 중심이었다. 작은 정원과 미술관, 온천 여관들이 모여 있는 마을. ‘하코네 미술관’의 이끼 정원은 내가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안겨주었다. 이끼는 마치 눈처럼 조용히 내려앉은 시간이었고, 그 위로 지난가을 떨어진 작은 단풍잎들이 스러져 있었다. 정원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문득, 도시에서 놓치고 살던 ‘침묵의 감정’이란 것을 다시 기억해 냈다.
고라 역에서 하코네 로프웨이로 갈아타고 오와쿠다니(大涌谷)로 향했다. 로프웨이는 천천히 하늘을 가르며 산등성이 위를 건넜고, 어느 순간 풍경은 갑자기 달라졌다. 마치 지구의 속살이 벌거벗겨진 듯한 땅, 여기저기 곳곳에서 흰 김이 피어오르고 누런 유황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다소 낯설지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암석지대. 오와쿠다니에 도착하자,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하코네’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학창 시절에 읽었던 '하코네에서 온 편지'이다.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신통방통하게 서명만 기억이 남아있다.
유황이 뿜어져 나와 산을 덮고 마을로 내려온 유황냄새를 맡으며 산으로 오른다. 3천 년 전, 하코네야마(箱根山)의 최고봉 가미야마가 마지막으로 분화하며 만들어낸 이 땅, 오와쿠다니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지구의 한 단면처럼 기이하고 황량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지면 곳곳에서 지하의 열기가 부글거리며 솟아오르고, 화산활동을 감지하는 장치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설치되어 있다. 지표로 기포를 내뱉으며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는 수증기, 온천의 진원지이기도 한 석회석을 물에 풀어놓은 듯한 희뿌연 산성천이 흐르는 계곡에서 분출되는 연둣빛 가스, 산 아래와는 확연히 다른,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황폐한 강 산성의 토양, 지옥의 골짜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곳 사람들은 오와쿠다니를 ‘지옥의 골짜기’란 의미의 '지코쿠다니(地獄谷)'라 칭한다고 한다. 하코네 화산의 분화 활동으로 생겨난 이 거친 땅은,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을 품고 있다. 산의 틈새마다 피어오르는 증기, 황톳빛으로 변한 흙,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조심스레 놓인 산책로. 내가 걷는 발자국조차도 이곳에선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구라는 별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이곳은 땅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온천욕을 마음껏 즐기는 하코네 원숭이들에겐 이곳이 천국인 셈이다. 일본상인들도 이들에겐 돈을 받지 않으니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주인공들이다.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계곡에서 온천을 즐기는 원숭이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듯 평온하다. 유황이 자욱한 계곡에서 온천을 즐기는 원숭이들을 바라보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이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는, 결국 보는 이의 몫이라는 것을, 무엇이 천국이고 지옥인지, 무언가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신비를 깨닫는 오와쿠다니 계곡이다.
유황냄새와 고온의 휩싸인 산은 언제 화산이 분출하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광경, 우리에겐 참으로 낯설고 처음 접하는 광경이다.
관광객들이 ‘검은 달걀’을 하나씩 사서 들고 다닌다. 이 지역 온천수에 삶아 검게 변한 계란은 ‘하나 먹으면 수명이 7년 늘어난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나도 하나를 들고 벤치에 앉아 껍질을 까며, 7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했다.
그때 즈음이지 싶다. 코를 찌르던 유황냄새가 다소 익숙해지면서 1개를 먹으면 7년, 2개를 먹으면 14년의 수명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유황물에 삶아서 껍질이 검게 변한 달걀인 구로타마고(黒玉子)를 먹으며 하코네 오와쿠다니의 짙은 인상을 함께 맛본다.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나는 어디로 더 걷게 될까."
도쿄, 신오쿠보, 그리고 하코네…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남은 길이 길다는 건 어쩌면 여행의 가장 아름다운 점인지도 모른다.
오와쿠다니에서 내려다본 하코네 산맥은 안개에 반쯤 가려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상상하게 되는 풍경.
그건 꼭 인생 같았다.
계획보다 예감이 더 중요하고, 목적지보다 풍경이 더 오래 남는 그런 여정.
아무튼 이방인이고 여행자인 우리 일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지구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하코네 사람들을 마주한다. 화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 하코네 사람들이다.
연신 거품을 뿜어내며 금방이라도 품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낼 것만 같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화산을 내려오며,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불쑥 끄집어내었다.
몇 해 전, 강릉 남항진의 바다 앞에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디든 혼자 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의 소망을 떠올리는 지금, 나는 일본의 화산지대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겹의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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