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신주쿠에서 하코네로, 창밖의 일본을 걷다
오다큐 "로망스카"는 일본인에게도 인기 있는 관광지인 신주쿠에서 하코네, 에노시마・가마쿠라를 연결하는 전석 지정석 특급열차다. 차창 밖으로는 태평양에 접해 있는 가타세에노시마를 비롯해 전원과 산간마을 등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실 수 있으며, 날씨가 도와주면 후지산도 볼 수 있다. 열차를 이용하는 여행의 격을 한 차원 높인 교통수단인 셈이다. 그러한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로망스카” 특급열차를 추천한다.
오다큐선 로망스카 특급열차의 창밖으로 도쿄의 아침이 빠르게 흐른다. 신주쿠역을 출발한 열차는 마치 하나의 시간여행처럼, 도심의 빌딩숲을 뒤로하고 점차 일본의 일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처음엔 거의 모든 대도시들이 그러하듯이 보기만 해도 숨 막혀 오는 고층빌딩들이 차창을 가득 메운다. 유리창 너머로 스쳐가는 네온 간판과 무표정한 회색 건물들, 그 속에서 급히 움직이는 도시인들의 발걸음. 익숙한 풍경이지만, 조금씩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며 도쿄를 빠져나오면 풍경은 이내 달라진다. 지붕을 볼 수 없는 빌딩들과는 달리 낮은 건물들과 다다미가 깔린 듯 다닥다닥 지붕이 보이는 주택들이 시야를 채우기 시작한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들, 전철역 옆으로 조용히 흘러가는 작은 강. 도시의 속도를 벗어난 일상이 차창을 가득 채운다. 여행자의 시선은 이때부터 조금은 숨을 돌릴 듯 창 밖의 풍경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들판에는 막 피어난 벚꽃이 살랑거리고, 멀리 언덕 위엔 붉은 단풍보다 더 부드러운 분홍빛이 내려앉는 봄은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여정이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을 나고 있는 논밭 사이로 무심한 전철들이 지나가고, 철새들만 한가로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이를 찾는 시골 풍경이 여행자에겐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시골 풍경이다. 그 옆 작은 텃밭에 서 있는 노인의 손끝엔 아직 지난가을의 습관이 남아 있는 듯 땅을 뒤적거리고 있는 듯했다.
열차는 다시 속도를 높인다. 가나가와 현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전원의 풍경이 나타난다. 멀리 보이던 숲이 깊어지고, 산이 가까워진다. 신마쓰다역을 지나며 창밖으로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인다. 웅장한 후지산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다. 그 모습은 마치 젊은 시절 읽었던 오래된 일본 문학 속에서 막 빠져나온 한 장면처럼, 고요하고도 장엄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오래된 전설 속 풍경처럼 여행자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 눈 내리는 풍경, 하코네의 온천 여관에 앉아 사랑을 기억하던 책장 속에서 살아난 한 편지의 장면들. 그 속의 일본은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절제되고 다소 미묘한 공간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얼마 전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내가 마주하는 일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곳엔 한글 간판이 즐비하여 여기가 일본 땅인지를 의심케 하였고,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삼겹살 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귀에 익숙한 음악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도쿄의 신오쿠보 뿐 아니라 오사카의 도톤보리, 신사이바시 거리에도 이국적이던 한식이 이젠 일상의 맛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열차 안에서 바라보는 일본의 전원 풍경은 또 다른 세상을 보는 듯했다. 내가 걷는 이 일본은, 과거의 문학이 보여주던 ‘이방’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삶이 겹쳐진 현재형의 풍경이었다.
열차가 하코네 유모토역에 도착할 즈음, 산은 더 깊어지고 하천을 따라 늘어선 온천 여관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온천에서 새어 나온 희뿌연 김, 전통 상점 앞에 나란히 걸린 유카타와 등롱들, 높아봐야 2~3층 정도의 목조 주택들과 상가들은 일단 도심을 떠나 온 여행자들에게 휴식 같은 공간을 선물한다.
센다이의 설국에서 시작한 여행이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를 지나 자연과 전통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로망스카 특급열차는 나를 온천지역에서 느낄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전원풍경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여정 또한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도시와 전원의 풍경이 바뀌는 곳, 일본은 어쩌면, 시간을 겹겹이 접어 차곡차곡 보관해 놓은 여행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코네 속살을 헤집고 들어간다.
하코네, 김이 피어오르는 산속 마을에서
기차가 멈췄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코네 유모토역의 작고 정갈한 플랫폼과 그 위로 피어오르는 희뿌연 김이었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천천히 데워두었던 것처럼, 역을 내리자마자 몸을 감싸는 따뜻한 공기와 함께, '온천 마을'이라는 말의 따듯한 온도가 체감되기 시작했다.
하코네는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아스팔트 길은 좁았고, 상점들은 대부분 나무 기둥과 종이문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카타를 입고 걷는 노부부, 작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온천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 사이로 졸졸 흐르는 강물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이어진다.
역 앞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하코네 전통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의 풍경은 여행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유리 공예로 만든 작은 풍경(風鈴), 붓글씨로 적힌 오센베이 간판, 나무로 짜인 장난감 가게와 유황향이 스며든 찻집.
그 모든 것들이 이곳을 하나의 ‘속도’로 만든다. 빠르지 않고, 늦지도 않은. 그저 걸음과 마음이 같은 보폭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곳, 하코네는 그런 곳이다.
나는 ‘다마노유(玉の湯)’라는 작은 온천 여관에 들렀다. 온천탕에는 이미 두세 명의 여행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흐릿한 안개와 함께 하코네의 초록초록 산맥이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왔다.
물은 미지근하고 부드러웠다. 잠시 눈을 감으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풀어졌다.
"여행은 결국 낯선 풍경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이 말이 문득 떠오를 정도로, 하코네의 온천은 묵은 피로가 아닌, 오래된 감정을 천천히 풀어내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온천에서 나와 아시노코 호수 방면으로 향했다. 하코네 등산 철도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이내 드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아시노코는 잔잔했다. 배가 떠도 물결 하나 크게 일지 않는 호수. 멀리 하코네 신사의 붉은 도리이가 물 위에 서 있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해적선 모양의 유람선이 천천히 미끄러져 간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호수 건너편으로 흐릿하게 떠오른 후지산의 실루엣은 마치 마음속 기억처럼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순간, 내가 읽은 ‘설국’의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하코네의 시간도 그랬다. 도심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도착한 이곳, 온천에서 산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물소리가 흐르며, 호수가 말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공간.
하코네는 한 편의 시였고, 동시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과거 학창 시절 읽었던 “하코네에서 온 편지”라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의 소설처럼, 나는 어느새 그렇게 하코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일본의 옛 정취와, 지금의 내가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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