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과 탁 사이에서 – 에페소스에서 생각한 삶

by 조영환

줄과 탁 사이에서 – 에페소스에서 생각한 삶


행복해질 만하면, 꼭 무슨 일이 터지고, 또 무너지는 일이 찾아온다.
조금은 웃을 수 있을 것 같던 하루도, 예상치 못한 거친 파도에 휘청이며 오롯이 견뎌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왜 내 인생은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왜 나는 늘 이 모양일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자조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곤 한다.


그 마음, 참으로 오래 붙잡고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남들 다 쉬어 갈 때에도 남들보다 더 자주 무너지는 것 같고,
유난히 무거운 껍질을 안고 살아가는 듯한 기분.

남들보다 더 오래, 더 어두운 데서, 나 혼자만 싸우는 기분.

살 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견뎌야 할 고비가 몰려온다.

얼마 전, 나는 튀르키예 여행 중 에페소스 야외 박물관을 찾았다.
햇살 아래 흩어진 고대 도시의 잔해들,
무너진 기둥과 지붕, 그리고 이름 없이 남겨진 조각들 사이를 걸었다.


유적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문득, 그곳에 살았던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우리처럼 웃고 울고, 사랑하고 다투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늙고 병들어 끝내 떠났을 것이다.


살 만하다 싶으면 또 흔들리는 하루를 살아냈을 것이다.
그들도 인생의 불안정함과 희망 사이에서 이 도시를 오가며 버텨냈을 것이다.

삶의 이유를 묻고, 또 포기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도 인생을 예측하지 못했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수천 년 전 그들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무색하게,

인간의 마음, 사람들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 생각이 내게 알 수 없는 이상한 위로와 안도를 주었다.


삶이 때때로 힘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지금 이 고단함이 특별히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

누구의 삶이나 크게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껍질 속에서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뭘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진실이었다.

행복만 존재하는 삶은, 애초에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에페소스에서 만난 그 옛사람들도, 그렇게 그들의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세상 모든 시작은 고요한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병아리는 알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작고 여린 부리로 껍질을 쪼기 시작한다.

병아리에게 껍질은 세계인 셈이다.


그 쪼는 소리, 줄(啐).

그것은 "살아 있고, 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신호다.

“살고 싶다”는 생의 가장 원초적인 신호다.


하지만 병아리 혼자서는 그 껍질을 완전히 깨뜨릴 수 없다.

그 소리를 들은 어미닭은 알을 감싸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껍질을 두드린다.

그 소리, 탁(琢).

바깥에서 날아오는 다정한 응답이다.


줄과 탁.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움직임.
이 둘이 맞닿을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세상과 만난다.


삶도 그렇다.

지금 겪고 있는 우리의 고통과 애씀은 우리가 보내고 있는 ‘줄’ 일지 모른다.

너무 작고 조용해서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여린 신호지만,

사실은 포기하지 않고 삶을 향해 내딛고 있는 부리의 흔적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탁’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때로는 외부로는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껍질을 쪼며, 살고자 애쓰고 있다는 증거, '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도와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안에서 깨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인 것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내가 이 안에서 깨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누군가는 들을 것이다.

내 작은 몸부림을.

내 조용한 신호를.

그리고 다가와 줄 것이다.


줄이 없으면 탁도 없다.
먼저 몸을 일으켜야, 세상도 응답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당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당신은 지금 껍질을 쪼는 '줄'을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아직 침묵하고 있다면, 어미 닭도 알 수 없다.

당신이 깨어나고 싶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고요한 ‘줄’을 하고 있는 동시에 누군가의 ‘줄’을 들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힘들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왜 내 인생은 이럴까…”라는 혼잣말로 겨우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탁’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

누군가가 조용히 몸부림치고 있다면

그 미세한 신호를 듣는 귀가 되기를.

그 미세한 떨림을 듣고,

그 껍질에 탁, 다정한 응답을 건네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사는 인생들이다.


이 에세이를 쓰는 지금,
나 역시 줄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군가의 ‘탁’을 기다리는 중일지도.


그렇다면, 너무 낙심하지 않기로 한다.

줄은 신호이고, 탁은 응답이니까.

우리의 신호는 반드시 닿는다.

조금 늦더라도, 결국에는.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아픔은

껍질을 깨기 위한 소중한 과정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고요한 울림 속에서 당신은 이미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당연히 에페소스의 무너진 기둥 사이에서도,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줄과 탁이 있었을 것이다.

수천 년 전 에페소스를 살다 간 이들 또한

그런 줄과 탁의 사이에서, 그렇게 껍질을 깨고 살아갔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행복만 있어야 한다는 건, 애초에 세상이 준 약속이 아니었다.

불행이 온다고 해서 당신이 잘못 산 것은 아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단함은 살고자 하는 ‘줄’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줄에 응답하는 누군가의 ‘탁’이 분명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삶이 행복만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절망만 있는 것도 아닌 셈이다.


무릇 삶은 늘 껍질을 깨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단지, 이 껍질을 깨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중일뿐이다.

그때, 삶은 다시 열린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깨어나며, 우리는 또 한 번 세상과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열린다.

내가 두드리고, 누군가가 응답할 때.

누군가 두드리고, 내가 응답할 때.

그때 생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열린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깨어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껍질을 깨는 일을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줄’에 응답하는 누군가의 다정한 ‘탁’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2024년 11월 20일~11월 28일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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