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하지 말자 — 늙음은 서서히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선희 씨 가 링크해 준 글을 읽다 보니 좋은 말이었지만, 경고와 조언만이 강조되고 위로의 온도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제 삶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몇 마디를 보태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착각하지 말자 — 늙음은 서서히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우리는 노후에 대해 참 많이 착각합니다. 광고 카피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문구를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 보지만, 숫자는 결코 공허한 기호가 아닙니다. 1961년생이라면, 그 숫자는 65라는 몸의 기록이 되어 매일 아침 거울 속 눈가에 자리를 잡습니다. 거울 앞에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들여다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질서 없는 풍경이 사뭇 달라 보이지요. 웃음 몇 줄이 늘어난 얼굴, 무거워진 걸음, 통증이 머문 자리 — 모두 숫자가 남긴 흔적임을 스스로의 얼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 역시 또 다른 착각입니다. 현직에서 물러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삶이 덤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준비 부족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60이라는 나이가 정말로 새로운 시간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가고 싶을 댄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 읽고 싶던 책을 펴고, 한낮의 길을 걸으며, 미뤄둔 편지를 써보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착각과 선물,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착각만 남고, 준비하면 선물이 됩니다.
많은 책에서 “100세 시대, 죽을 때까지 일하라”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병원 복도와 요양원 홀을 채운 사람들을 보면 ‘계속 일한다’는 화려한 사례 뒤에 놓인 고통이 보입니다. 저는 80세 안팎까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되, 그 이후에는 ‘편히 즐기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과 취미,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몸과 마음은 결국 쉬지 못하게 됩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누구나 늙고, 누구나 아프며, 누구나 기억의 변주를 겪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겸허해질 때 비로소 준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준비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매달 작은 건강 점검을 하는 것, 서랍 하나를 정리하는 것,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다정한 말을 한 문장 더 건네는 것 — 그런 사소한 실천이 모여 삶의 품격을 지켜줍니다.
나는 2015년 대장암 수술을 받기 위해 새벽 5시에 수술실에 들어가 밤 10시가 넘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대장 길이는 자신의 키와 거의 같다고 합니다. 등 내벽에 붙어있는 대장 전체를 박리하고 S결장을 20cm 자른 후 다시 잘린 대장과 직장을 이어 붙이는 대수술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후유증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11년 차에 들어섰습니다만 지금도 아주 가끔은 후유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입니다. 그런 와중에 2019년엔 아내마저 췌장암으로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겨내 보겠다고 내 몸을 단근질하고 풀무질하듯, 미친 듯이 산을 타고 다시 불꽃을 지펴 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세 개의 산을 오르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이었습니다.
덕암 스님의 말씀처럼 통계와 숫자는 저에게도 너무나도 차갑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나에게 주어진 남은 날들을 계산해 본 적이 있습니다. 통계상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이 80세에서 85세라고 하지요. 여자는 조금 더 길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법 많은 시간이 남은 듯하지만, 그중 3분의 1은 잠으로, 또 3분의 1은 일과 잡다한 일들로 채워집니다. 결국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은 3분의 1, 실제로는 약 5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문제는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 의지대로 활동하며 보낼 수 있는 나이를 70세까지로 한정해 다시 계산해 보니, 나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년 반 정도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1.5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숫자상으로는 길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짧고 귀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남은 1년 반을 그렇게 살아보자’는 다짐에 이르렀습니다. 나이에 맞는 생각, 말, 행동, 운동, 여행을 차분히 이어가며, 나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가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의 온도를 스스로 조절해 가는 것. 그것이 제가 붙잡은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려고 애쓰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와 우리 친구들의 하루하루는 여전히 따뜻합니다. 그러한 따듯함으로 이제 1.5년을 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맙다, 잘해왔구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덕암 스님의 말씀처럼 경고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준비는 늦지 않았고, 준비는 혼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남은 시간을 서로의 빛으로 밝혀주며 걸어갑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온 인생입니다.
@Thebcstory
*이 글은 친구가 보내 준 덕암 스님의 말씀을 토대로 작가의 개인적 생각을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