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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May 22. 2022

저항 정신과 BBC: 재밌는 이야기들

BBC와 만우절 유머, 국가 논쟁, RATM 방송에 관한 이야기

Disclaimer: 저항이 주제인 만큼 특정 비속어를 가리거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적었고, 한국어로도 가장 비슷한 어감을 가진 비속어로 번역했습니다.




내겐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언론인으로 일해온 커리어와 경험이 있다. 부정함의 고발, 올바르지 않은 가치의 폭로, 부패와 부정의 효수 같은 가치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짧게나마 BBC에서 일하며, 이런 가치들을 더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BBC 역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과 오명 있는 역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에서 공영성과 중립성으로 대표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고, 현 체계와 구성원들도 이 가치를 보존하고 적극 지키려고 하고 있는 곳이기에 의미하는 바가 사소하지는 않다고 느낀다. BBC 에디토리얼 가이드라인이 지시하듯 BBC의 보도는 공익, 진실성, 공평함과 정확성, 불편부당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저항’이라는 어법이 매우 빈번하게 활용된다. 권력, 편견, 반지성, 차별, 거짓 등에 대한 전시, 항거, 반발, 비판 등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BBC와의 인연과 인연 후에 두루 'BBC'와 '저항', 두 개념이 우연찮게 콜라보를 이루는 여러 사례들을 알게 됐고, 적당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어 그것들을 정리한다. BBC가 저항의 주체였던 적도, BBC가 저항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다.  




쿠르드족과 BBC

BBC 본사인 뉴 브로드캐스트 하우스(New Broadcasting House)에서 잠시 연수를 받으러 잠시 영국 런던에 갔었다. 하루는 퇴근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려고 로비로 나왔는데, 경비 직원들이 정문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유리창 건너로 보니 정문 앞 뜰에서 시위대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불미스러운 충돌을 막으려는 조처였다.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우회길로 안내해 본사 측면에 있는 라디오국 출입구로 직원들을 나가게 했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갈 수 없지! 어떤 시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건물을 끼고 돌아와 곧장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시위대는 걸개와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위치며 시위를 했다. 근처로 가니 시위자들이 유인물을 나눠줬다. 내용을 보니, 시위대들은 쿠르드족이었다. 고3 때 세계지리를 배우면서 중동 지역을 배우면서 쿠르드족에 관한 내용을 배웠지만, 실제로 쿠르드족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2019년 3월 26일 NBH 앞에서 열린 쿠르드족 시위


이들은 BBC가 쿠르드족이 받는 핍박과 터키에서 벌어지는 마찰을 보도하지 않음 비판하며 “BBC는 부끄러운 줄 알아라(Shame on you, BBC)”라고 외쳤다. 또 터키에서 무기징역으로 20년째 수감 중인 정신적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과 보도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BBC는 꾸준히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관심 가져야 할 쿠르드족 문제에 보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보도에 아쉬움을 가질만하고, 전 세계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BBC에게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할 수도 있다. 쿠르드족의 시위는 정당했다.


그들의 오랜 염원대로 쿠르디스탄이 탄생할 수 있을까?  


만우절 유머

공영방송은 직관적으로 따분함이 떠오른다. 노잼에 융통성도 없을 거 같다. BBC가 트렌디하다거나 유머감각이 넘친다거나 하는 이미지는 전연 아니다. 방송사가 엄숙함과 진지함을 갖추는 것도 좋지만, BBC는 이따금씩 이러한 기대와 금기를 깨며 저항한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만우절 장난이다. BBC의 몇 가지 만우절 장난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나무에서 자란 스파게티 면을 수확하는 영상을 내보내 그걸 믿게 한다거나, 빅 벤을 현대화해 아날로그 시대 대신 디지털시계로 바꿨다고 속인다거나, 다큐멘터리에서 펭귄이 단체로 날아가는 장면을 방송한다는 식이다.

빅벤은 4년 간의 개보수를 마치고 올해 다시 돌아왔다!

꽤나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가져가지만 가끔 있는 똘끼 넘치는 장난으로도 특유의 기믹을 선사한다. BBC는 1957년부터 시작된 만우절 유머를 아카이빙 한 페이지를 제공한다.




국가주의와 BBC

BBC는 영국의 국왕이 주는 ‘칙허장(Royal Charter)’에 근거해 운영된다. 엄밀히 말하면, 공영성과 중립성의 실현이 영국 국왕의 보증 아래 가능한 것이다. 이런 거버넌스를 보면 일견 BBC도 입헌군주제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창사 이래 꽤 그런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려고 부단히 힘쓴다.


오늘날 BBC의 중립성은 하나의 국가로서의 영국이란 국가와 정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1982년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포틀랜드 섬의 영유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을 때도 ‘아군’이나 ‘우리군’ 같은 표현 대신 ‘영국군'이라 칭했다. 보도 행태와 논조 역시 우리와 적의 싸움인 것처럼 묘사하지 않고, 제3자인 것처럼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을 보도했다. BBC의 운영은 전적으로 영국 시민들의 막대한 수신료(가구당 매년 약 25만원)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 '우리나라'라든지 하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저 '영국 국민' 혹은 '영국'이다.


이렇듯 공영방송사로서 BBC가 케케묵은 국가주의에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유쾌한 순간도 있었다.


2016년 브렉시트 찬반을 두고 영국 국론이 양갈래로 나뉘었을 때였다. 보수당 의원인 앤드류 로진델이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할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BBC One 채널이 방송 종료 시간에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을 틀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참고로, BBC 라디오 채널 중 일부에서는 방송 종료 시간에 국가를 틀긴 하지만, BBC의 가장 간판 채널인 BBC One과 주요 채널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은 여전히 지상파 방송 3사의 방송 시작과 종료에 맞춰 애국가가 나온다)



당시 이런 요구가 정치권에서 나오자 BBC ‘뉴스나이트’라는 프로그램 진행자 커스티 워크는 프로그램 클로징 멘트를 통해 “(의원 말대로) BBC One 채널도 아니고, 방송 종료하는 시간도 아니지만, 기쁘게 그 요구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틀어주는 음악을 틀어줬는데, 국가 ‘God save the Queen’이 아니라 섹스 피스톨스의 동명의 곡이었다.


섹스 피스톨즈 'God save the Queen' 커버 이미지


섹스 피스톨스의 'God save the Queen'은 1977년에 발매됐으며, 군주제와 계급제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영국 사회에서 노동자 계층의 불만과 저항을 대변해 여왕을 찬미하는 내용의 국가를 패러디해 영국 거버넌스와 사회를 풍자한 곡이다. 섹스 피스톨스는 여왕을 상징적으로 소환해 노골적인 비아냥과 비판을 쏟아냈다. 어느 정도였나고? 영국은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비유하고, 여왕은 "인간도 아니야"라고 까는 정도다. 이런 이유에서 초기 음악 발매 당시엔 BBC가 이 곡에 방송 금지를 먹였다.


BBC가 이 곡을 틀었던 사건을 한국의 상황으로 비유하고 싶은데, 도저히 비유할 수가 없다. 우선 애국가를 패러디해서 한국 사회의 병폐와 사회 문제를 조롱하는 노래도 필요하다. 그리고 KBS가 이 노래를 직접 방송 중 송출하는 상황이어야 한다. 두 시나리오 모두 2022년 기준으로 가능할까..?


BBC는 방송가에서 쌍팔년도식 애국을 찾는 정치권의 요구에 저항을 담아 유쾌하게 비꼬았고 유튜브에 이 클로징 순간을 박제했다. 재밌게도 2022년에도 국가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화부 장관과 로진델 의원을 비롯한 보수당 인사들은 BBC이 국가를 틀어야 한다는 주장을 여전히 하고 있고,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를 두고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축구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개리 리네커는 이런 논쟁에 "그래, 더 영국스러워지지 말고 더 북한스러워지자"라고 비꼬았다. (한국도 튼다는 걸 알려줘야겠는데?)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의 'God save the Queen'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즉위 70주년)인 2022년 6월을 맞아 리마스터링 버전 싱글이 재발매된다! 이 소식 역시 BBC도 보도했다.



"시발 너네가 하라는 대로 안 해!"

록 음악과의 재밌는 인연은 또 있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이라는 전설적인 랩 메탈 그룹이 1992년 ‘Killing In The Name’을 발매했다. 이 곡은 록 씬은 물론 저항정신을 대변하는 명곡으로 RATM을 대표하는 곡이 됐다.



이 곡이 2009년 크리스마스에 역주행하며 음악 차트 1위에 등극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인기 음악 경연 프로그램인 ‘엑스 팩터'의 출연자들이 매년 연말 차트를 독점하다시피 했고, 이에 불만을 갖고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캠페인을 시작한 것. 저항의 상징인 이 곡을 스밍 해서 미디어셀러들을 누르고 1위에 올리자는 목표였다. 그러나 거칠고 비트 강한 곡이 연말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캠페인 파급력도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 해프닝으로 그치나 싶었다. 그러나 ‘엑스 팩터' 심사위원인 사이먼 코웰이 캠페인을 겨냥해 “쪼잔하다"는 드립을 날리면서,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몰리며 기여코 이 곡을 1위에 올린 사건이었다.


레전드 곡이 다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자 RATM은 다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인사를 할 기회를 가졌고, 오랜만에 방송 무대에 나섰다. BBC 라디오 5에서도 RATM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고 라이브 방송으로 퍼포먼스를 전했다.

문제는 이 곡에 방송에 송출되기에 노골적인 욕설 가사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Fuc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좆까, 네가 하라는 대로 안 해!)”라는 문장이 곡 말미에 16번 반복된다. 이어서 “Motherfucker!(씹새끼야!)”라는 외침으로 마무리되는 곡이다.


강한 욕설이 들어간 배경은 이렇다. 1990년대 흑인에 대한 미국 경찰들의 과잉 집압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담아 만든 곡이며, 그런 만큼 굳은 결의와 의지를 드러내기에 비속어를 빼놓을 수 없었고, 이 곡의 클라이맥스이자 핵심이 되는 구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BBC 가이드라인상 상스러운 언어는 방송에 부적합해 내보내지 못한다. 물론 RATM과의 사전 협의에서 욕설은 생략해달라고 얘기가 됐다.


그러나...


공연부터  중단되기까지 당시 실제 방송 버전


보컬인 잭 데 라 로차는 이 가사가 들어가는 파트에서 처음 8번은 “Fuck you”를 생략했고 별일 없이 무대가 마무리되나 싶었다. 절정에 치닫는 파트가 시작되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원래 가사대로 “Fuck you”를 외치기 시작했다. 욕설을 빼 달라는 BBC에 “네가 하라는 대로 안 해!”라고 외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 방송에선 욕설이 나오자 급히 방송이 중단됐다. 진행자들도 당황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고, 안 할 줄 알았는데 이분들이 원래 곡대로 불러 버렸네요”라고 해명했다.


전체 무대를 볼 수 있는 버전


마크 트웨인은 용기란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고, 두려움의 정복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저항정신은 인간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분명히 저항해야 할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외면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적절한 때에 누구나 저항하고 분노해야 한다. 오늘도 RATM 노래를 들으며, 저항 게이지를 가득 충전하고 잠에 들어야겠다!

Courage is resistance to fear, mastery of fear-not absence of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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