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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Jul 18. 2022

'우영우'는 자폐인, 나는 비자폐인?

'비정신질환=일반성, 보편성, 평범성'을 거부하는 게 나를 위한 길

정신병을 겪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26살 때였다. 우연히 대학교 필수 봉사활동으로 정신병원과 인연을 맺게 됐다. 정신질환은 나와는 분리된 영역에 있는 것이라고 인식했던 때였고, 1년 간 봉사활동을 이어가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전환되었던 시기였다. 


외부 접촉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심지어 가족 면회도 일정 제한되는 병동 안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흔히 정신병 환자라고 알고 있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환자부터, 왜 이 안에 입원했나 싶을 정도로 바깥에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지극히도 평범해 보이는 환자까지 다양했다. 입원이 결정되기까지는 너도나도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이 있었다. 


처음엔 나도 낯선 공간에 적응하고 안에 있는 분들과 안면을 트는 과정엔 그냥 자원봉사자에 불과했다. 그렇게 환자들과 친밀감을 형성했고, 내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날짜보다 늦게 병원에 들어온 환자들한테 장난스럽게 텃세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친분감을 쌓았다고 느낄 무렵, 깨달은 게 있었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을 겉모습만 봐서는, 심지어 조금 얘기해보는 것 정도로도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문의의 진단만이 이들이 정신질환자가 되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전문의의 진단을 피한다면 정신질환자 없는 세계가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었다. 나는 나는 봉사자로 병동 안에 들어왔고, 그들은 환자로 병동 안에 들어온 것인데,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들과 나 사이에 분절되는 정신적 차이는 규정할 수 있을까. 바깥의 수많은 마음 아픈 사람들은 왜 병동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는 것일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왜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단한 이유 없이 경멸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아무 근거 없이 동정까지 할까.


정신병동에는 대중문화콘텐츠에서 비슷하게 묘사되는 사람들만 있으리라 상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새롭게 깨닫는 바도 있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는 사노라면 어느 특정 시점에 크고 작은 정신병에 시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걸 인정하고 나서 보니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가 나쁜 것만이 아닌 누구나 부담 없이 편하게 신세질 수 있는 도움의 손길임을 알게 됐다. 몸살 기운이 강하면 내과에 가고 허리가 아프면 정형외과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주변에 불안과 우울로 이겨낼 수 없는 정신적인 압박과 고통을 보이거나 호소하는 친구를 볼 때면, 치료를 권했다. 자발적으로 정신과 병원에 발길을 딛는 친구들에겐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는 불행하고 우여곡절 많은 소수의 특정 환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졸업 시기는 늦춰지고, 진로는 불투명했던 때였다. 늦은 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매번 불안감에 휩싸였다. 불안감은 매번 독특한 상상으로 시작됐다. 자세히 묘사하면 이런 식이다. 내가 자고 있는 내 방, 내 방이 있는 우리 집 같은 게 수백 세대가 있는 아파트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자는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 고통 하나 없이 죽을 수 있어서 좋은 건가? 붕괴와 함께 깜짝 놀라 깨는 동시에 죽음을 맞는다는 건 또 얼마나 무서울까. 아니? 오히려 가족 중 누구 하나만 죽어 슬프기보다 온 가족이 한꺼번에 그렇게 되면 차라리 다행인가? 이런 식으로 상상이 상상을 낳고 상상은 시나브로 상상을 넘어 편집증(망상장애)으로 생각이 확대해나갔다. 그렇게 그 시기에 밤늦게 침대에 누워 종종 1~2시간을 허비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내가 정신질환을 겪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정할 준비가 됐기 때문이었다. 진로에 대한 불안과 과민함 등 환경적인 요건으로 발현한 일종의 망상장애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일시적으로 겪는 것일 거라며 스스로 안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안정된 일상을 찾으면 서서히 나아질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결국 느슨하게 옳아맸던 망상은 인식할 찰나도 없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신질환에 대한 열린 마음과 태도는 이처럼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정신질환이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더 불안해했다면 더 큰 어떤 마음의 병으로 나아가고 몸의 병까지로 옮겨왔을지 모른다.



정신병을 일상적이고 특수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자폐증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변화를 겪고 있다.


드라마는 빈번하게 자폐도 흑과 백처럼 구분 지어지는 게 아니라 스펙트럼이라고 이른다. 세고 약하고의 정도가 있으며, 자폐증 안에서도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눠진다는 의미다. 


이 말마따나 누구나 자폐증 지수(AQ)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가 진단법이 있다.  

이 홈페이지(http://hahong.org/q/aq/)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상과 관련된 간단한 질문 50개를 답하는 간단한 테스트다. 결과 점수는 0부터 50점까지며 자폐가 없는 성인은 대개 26점 이하의 점수가 나온다. 점수가 낮을수록 자폐 정도가 없어 더 좋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수학, 물리학과 공학계열 종사자들은 비교적  21점 이상의 높은 점수가 나온다. 수학 올림피아드 수상자 6인의 평균도 24점이었다. 자폐가 고지능과 상관관계가 분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폐 성향이 꼭 우리 사회에서 열등이란 개념이랑 결부되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특정 분야에서 비자폐인에 비해 매우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자폐인을 의미하는 서번트 증후군도 그런 사례다. (물론 서번트 증후군도 자폐 스펙트럼 중에서 매우 드문 케이스라는 점, 그래서 서번트 증후군이란 드문 사례로 자폐증에 편파적이고 그릇된 인식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다시 환기한다.)


나는 이 자가진단에서 9점을 받았다. 0이 아니니까 자폐성향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반대로 자폐성향이 높게 나온다고 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심지어 비자폐인이어도 자폐 성향이 많고 적게 내재되었다는 점, 그리고 자폐성향이 많고 적음으로 좋고 나쁨을 함부로 규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밥상을 스스로 차려본 적이 있는지 여부가 자폐를 구분 짓고, 성숙한 성인임을 증명할 핵심 질문이 아닌 것처럼, 물론 이 테스트는 참고만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페인과 비자폐인이 사는 흑과 백으로 이뤄진 곳이 아니다. 자폐성이 항상 인류 문명과 백해무익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도, 차별을 응당 받아야 하는 특성도 아니다. 자폐인 동물학자인 템플 그랜딘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마법이 지구 상에서 자폐증을 없앴다면, 인류는 아직도 동굴 입구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원시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폐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없었다면, 누가 돌창을 만들고, 누가 실리콘 밸리를 만들었으며, 누가 에너지 위기를 해결했겠는가?"



자폐를 비롯한 수많은 정신질환은 이 세상에 버젓이 존재한다. 무수히 많고 다양한 고래들이 넓디넓은 바닷속 깊은 곳에서 유유히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각기 다른 정신문제는 오색찬란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정상인', 일반인', '보통사람'이라는 그릇된 프레임 안에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집어넣지 말자. 참인 명제도 아니거니와 이렇게 한다면 나에게 정신질환이 찾아왔을 때 더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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