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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Oct 01. 2022

당신에게 파리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파리에 대한 낭만이 없던 이가 우연히 찾은 파리 여행에서 받은 깨달음

오랜 역사와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등장해 유명해진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이처럼 도회적인 인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찾다. 

파리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센 강이 깔리고 석조 건물 가득한 운치 있는 길거리로 유럽을 대표할 낭만으로 꼽히고 구석구석에 특유의 도회적인 면면이 가득한 곳, 에펠탑과 개선문 등 랜드마크가 가득해 여행객들이 꼭 찾아야 하는 방문지.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이유에서 파리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런 모습들은 UHD 다큐나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에서 다 볼 수 있었으니까. 출장과 휴가 일정을 마치고 파리에 있는 샤를 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일이 있었다. 이럴 때 구경해봐야지 언제 구경해보겠나 싶은 마음에 파리에 로망이 1도 없던 나는 파리에 3박 4일 체류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런 우연한 여행 경험은 깨달음을 줬다. 그 경험을 글로 남긴다.




파리는 사회 전체가 거꾸로 뒤집어지는 역사를 지녔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더 확장해서 무언가가 뒤집힌 이야기들은 곧 파리를 의미했다.


파리의 주요 명승지 대부분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대혁명 전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일련의 혁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시티 투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온갖 유적에서 빠짐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 언급됐다. 세계사 시간이나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우면서 인지한 교과서 속 프랑스 대혁명의 의의가 실제보다 초라하다는 걸 깨달았다. 파리 시민들은 아직까지도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을 독점했던 과거 왕족과 귀족들이라는 구체제의 모순을 박살 낸 프랑스의 역사를 사랑했고, 그 가치를 굳건히 이어오고 있었다. 


소등을 앞두고 하루 중 5분 동안만 볼 수 있는 하얀 조명만으로 장식된 '화이트 에펠탑'


에펠탑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진 대로 에펠탑은 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프랑스가 기술력 과시를 위해 지었지만 당대 파리 시민들에겐 혐오 시설이었다. 돌로 된 시설과 건물들이 가득한 파리에 거대한 철조 구조물이 어울리지 않아서 나올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에펠탑의 아성은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 어쩌면 인류를 대변할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건축물로 거듭났다. 이와 비교하면 당대의 혐오 인식이 대단히 생경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에펠탑은 시대와 세대를 거치며 혐오의 대상에서 모두의 사랑이 됐다. 


과거 왕궁이었다가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박물관이 된 루브르도 그런 상징 중 하나다. 루브르 안뜰에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만든 유리 피라미드도 혐오에서 조화로, 그리고 이제는 랜드마크까지 이어진 역사를 공유한다. 200주년 기념물 공모 과정에서 피라미드 안이 루브르와 어울리지 않아 큰 반대를 받았음에도, 우여곡절 끝에 선정됐고 계획대로 설치되었다. 많은 이의 반대로 들어섰지만,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으로 많은 관광객의 루브르 사진을 장식하고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서린 이야기도 빠지면 안 된다. 고흐, 마네, 모네, 피사로, 고갱, 세잔, 피카소, 에밀 졸라, 쇼팽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쳐 간 공간이다. 예술사를 이룩한 이들이 몽마르트르로 온 이유는 그들의 명성이나 파리의 인상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예술가들은 가난에 쫓겨, 예술 활동에 위기를 맞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몽마르트르에 모였다. 세상의 거친 풍파와 먹고사니즘에 시달리고 외로움에 사무친 비루한 예술가들이 거기에 모였다. 


마침내 그들은 몽마르트르에서 꽃을 피웠고, 오르세 미술관을 장식하는 주인공들이 됐다. 당대 루저들이었던 그들이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이들의 밑바닥 인생을 뒤집게 한 산실은 바로 몽마르트르였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테르트르 광장엔 여전히 그 숨결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커뮤니티와 관광객과 어울려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광장을 거닐며 화폭이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본 그때가 나에겐 파리에서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지금의 파리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축구장에서의 경험을 소개하고 싶다. 여행 일정에 운 좋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네이션스리그 축구 경기가 있었다. 파리 북부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경기장에 찾아 홈 팬들 자리에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다양한 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자국인 프랑스 국가대표팀을 응원했다. 


사실 경기장 밖 파리의 여러 공간에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지켜보면 자연스레 '이 모든 게 한 도시에 어우러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박히기 쉽다. 그러나 축구장에선 이런 의심이 쉽게 깨졌다. 아프리카계든 중동계든 프랑스 선수들이 좋지 않은 플레이를 하면 큰소리로 안타까워하고, 득점에 성공하면 똑같이 열광한다. 흥미로운 모습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 순간은 경기 시작 전 국가가 나올 때였다. 국가대표 선수들부터 파리 시민들까지 열렬하게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국가주의로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한국에서도 스포츠 경기나 국가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도 말이다.


사방의 관중들도 '라 마르세예즈'를 열창했다


'라 마르세예즈'는 다시 프랑스 대혁명과 이어진다. 당시 혁명가이자 프랑스 혁명정부의 군가였던 노래다. 다소 과격한 가사임에도 여전히 프랑스 국가로 사랑받는 건 혁명 정신이 깃들어있음이겠다.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다른 대륙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에겐 정당하지 못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경기장에서 본 '라 마르세예즈'의 역할은 내셔널리즘의 정수로서의 국가라기보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프랑스혁명 정신, 자유를 향한 염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표방하는 상징이었다.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보다 한 층위 더 높은 가치를 담아 다양한 프랑스 선수들과 시민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특히 경기 내내 관중석에서 열심히 흔들리는 프랑스 국기 '삼색기'도 마찬가지다. 삼색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국기는 프랑스라는 일국보다 더 큰 가치를 지시한다. 어떤 인종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열심히 국기를 흔들어 선수들을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비교하지만,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1919년이 아닌 2022년에 내가 태극기를 흔드는 일은 언제 있을지 모르겠다.


한데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시민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의미가 담긴 삼색기를 흔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민자들이 주축 멤버가 된 프랑스는 2018년 월드컵의 주인공이 됐고, 2022년 월드컵에서도 핵심 우승 후보로 꼽힌다. 축구장 안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들이 받았던 차별과 멸시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도 에펠탑처럼, 루브르의 피라미드처럼 파리를 구성하는 주인공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관광객들에겐 소매치기, 잡상인으로 대변돼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니 그것도 당연한 지사. 


그러나 파리에 스며든 고흐, 에펠탑, 피라미드가 빛의 도시 파리를 더 빛나게 하는 주역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의 존재론과 인식 틀을 뒤집은 역사가 간직된 도시가 파리 아니겠는가. 풍성한 다양성 안에서 탄생한 파리의 다음 꽃봉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 다음 세대는 파리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글이 프랑스에 다녀와 프랑스 뽕에 취해 쓴 글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랑스가 제국주의 시대 씻을 수 없는 오명과 여전히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현대 사회 문제가 있음에 공감한다. 그러나 아래에서부터 샘솟는 정신과 역사를 가진 커뮤니티, 다른 곳에서 온 구성원과 나와 다른 이웃에 대한 관용에 너그러운 자세를 가진 파리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시간이 이어지는 도시에 대한 존중과 경탄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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