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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Apr 07. 2023

이야기는 전진한다-조지 오웰과 나

선생님 통해  만난 '동물농장',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에릭 아서 블레어

언어에서 의미가 있는 최소 단위는 형태소다. 행복과 슬픔을 비롯해 인간에게 기억의 최소 단위는 이야기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굴레 아래 희노애락애오욕의 출처는 이야기다. 아무리 슬럼프에 빠지든,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든 그 자체가 이야기 위에서 벌어진다.


중앙에 있는 건물이 본관, 가운데 높은 중앙 탑 높이 있는 교실에서 ‘동물농장’ 수업을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름 학교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특별반을 운영했다. 그 문턱에 겨우 걸쳤던 나는 방과 후 특별 보강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돌로 예스럽게 만들어진 본관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는 탑에 있는 교실이었다. 맨 뒤 창밖으로 내다보는 전경이 썩 훌륭한 교실이다. 영어 교과는 S 선생님이 담당했다. 이미 정규 교과 수업에서부터 경상도 남자다운 카리스마 넘치고 무게감 있는 분으로 자자했다. 그때부터 연초도 많이 피우셨고, 약주도 많이 즐기셨다. 30명 넘는 혈기왕성한 사내놈 중 그 누구도 S 선생님 카리스마에 자그마한 어깃장을 보이지 못했다. 위압감이 얼마나 있느냐는 별명의 유무를 따져보면 알 수 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이 있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두려워하거나 위압감을 느끼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별명이 딱히 없다? 그것은 분명 존재감이 없거나 거대한 존재감이 있는 경우다. S 선생님은 분명 후자였다. 이따금 괴팍하신 걸로 유명하신 선생님이 보강 수업을 맡으시니 그 수업도 적막과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나마 호쾌한 모습이 엿보이고, 유머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셨기에 어렵지만 멀리 있는 것으로만 느껴졌던 선생님은 아니셨다.

그런 선생님이셨기에 정석 중의 정석으로 보강 수업이 꾸려지리라 예상했는데, 첫 수업부터 느닷없이 희한한 프린트를 나눠주셨다. 'Animal Farm'이라고 적힌 서적의 복사본이었다. 지금 회고하니 그건 저작권 위반이 아니었나? 그렇지만 EBS 교재도 아닌 영문 소설을 학생 각자에 돈 주고 사오라고 하는 것보단 복사본을 나눠주는 방편이 더 건전하긴 하다. 교실에 있는 교양에 한계가 있던 모든 고딩들은 모두 이게 무슨 책인가 어리둥절했다. S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한 문장, 한 문장씩 5형식 문장 구성형식에 따라 문장을 나눠보라고 했고, 무슨 의미냐고도 물었다. 대한민국 제도 교육 과정 속 영어 시간에 이런 수업이 있다니? 그러한 어색함과 '이런 수업이 맞는 건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나는 몰래 애들과 눈을 맞추며 삐질삐질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렇게 매 수업 다 함께 부지런하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어나갔다. 사설 모의고사 문제집도, EBS 수능특강도 아닌 나폴레옹을 둘러싼 이야기에 담긴 메타포를 인식하며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 무르익었다. 우락부락한 바위로 지어진 본관은 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무더위가 찾았다가 이내 서늘함이 닥칠 때까지 묵묵히 견뎠다.


여전히 서랍 한 구석에 자리한 당시 교보재


대학에 복학하고 한껏 캠퍼스를 즐기는 어느 봄, 스승의 날. 영우와 진석이와 학교를 찾았다. S 선생님은 우리를 잘 기억하셨고 반겨주셨다. 내 이름 앞글자와 뒷글자를 바꿔 부르시며 헷갈리셨지만, 생생하게 한 명 한 명의 개성과 그 수업을 또렷이 추억하셨다. 안국역 근처 현대 본사 앞 직장인들이 회식 많이 올 것 같은 식당에서 점심과 함께 반주를 사주셨다. 방과 시간임에도 거들어지게 전화를 드시더니 외국인 강사에게 당부 같은 통보를 하셨다.

- 졸업생들이 왔으니 맛있는 거 사 먹이고 들어갈 테니 수업 부탁한다. 괜찮지?

여전히 제자들만큼 약주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흘렀고, S 선생님이 세월만큼 약주도 삼키셨던 걸까. 우리가 권하는 술을 기뻐이 받으시는 잔이 들린 그 손이 벌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격한 수전증에 우리는 동시에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낮술로 얼룩진 그날 점심은 하하 호호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날이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뵈는 자리임을 아무도 몰랐다. 나는 한껏 취한 채 대학교 동아리방을 가서 봄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잤다.


마당이 있던 식당. 마지막 점심을 했던 곳.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시 시간이 흘러 취준생 시절, 느닷없는 연락을 받았다. 부고였다. S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영우와 그날 저녁 기차를 타고 한달음에 대구로 향했다. 동대구역에서 지척이었지만 종종걸음으로 갔지만 장례식장은 멀리 느껴졌다. 사모님과 아드님을 처음 뵀다. 서울서 고인의 제자들이 온 모습을 보시더니 슬픔 속에 잔잔한 반가움이 물씬 퍼져나감이 느껴졌다. 선생님께서는 병원에 입원 중에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마지막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려는 우리 손에 돈을 쥐여줬다. 그걸 받아 들고 돌아오면서 결례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답례금은 경북에서 흔히 있는 장례식 문화라고 하더라.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다르게 퍽퍽한 서울보다 섬세한 문화가 있었다.



S 선생님이 전해주신 조지 오웰과의 인연은 종종 내 생애와 조우함으로 이어진다. 오웰의 문학에 영감 받은 핑크플로이드와 데이빗 보위의 음악은 여전히 내 골든 플레이리스트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런던에서 우연히 에릭 아서 블레어(조지 오웰의 본명)와 다시 만난다. 근처 괜찮은 카페를 찾던 중 우연히 발견한 BBC 본사인 뉴 브로드캐스팅 하우스 한쪽 벽면을 마주했다. 흰 대리석에 적힌 글귀를 배경으로 구부정한 장신의 오웰 동상이었다. 한때 잠시 BBC에 근무했던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는 과정은 영국 안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조지 오웰의 동상을 언론사 앞에 세우자니 정치적 편향성이 제기된 것. 오웰은 좌파니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더니 결국 2017년 동상이 들어섰다. 흰 대리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눈을 가늘게 떠야 겨우 보이는 글귀는 '동물농장'의 서문에서 발췌됐다. 좌파라더니 그 글귀는 보란 듯이 정치와 시대를 초월한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다.'



조지 오웰이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다. 뉴스, 강의, 유튜브에서 수도 없이 7 계명, 빅브라더, 사상경찰이 소환되면서 그의 저작은 불멸의 존재가 됐지만, 저작권은 소멸했다. 이제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동물농장'의 복사본을 배포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S 선생님은 소멸했지만, 그 이야기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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