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건 선생님을 추모하며..
철학과 학부엔 전 학년에 걸쳐 논리학 강좌가 학기마다 2~3개쯤 열렸다.
그중 기호논리학만 전공핵심이기에 저학년일 때 모든 철학과 학생이 들어야만 했다. 기호논리학은 논리를 수학화한 것과 같다. 명제를 수학 공식에 대입해 참인지 거짓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처럼 논리 공식을 외우고 여러 명제 간 참과 거짓을 밝히고 논증이 건전한지 건전하지 않은지 따진다.
기호논리학을 수강하며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논리학의 환상이 깨져 논리학에 등을 돌리는 이들 그리고 학문으로써 (괴로운) 즐거움을 느끼고 논리학에 매료된 이들이다.
후자가 논리학에 재미를 느꼈다면 대부분은 단언컨대 논리학 강의를 맡으신 선생님 덕분이었으리라. 김영건 선생님은 논리학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강의를 들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좋아했다. 본교였던 서강대에서도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은 지루하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선생님 특유의 여러 발언들은 유행어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영건 선생님 강의는 가혹한 편이다. 교재로 내용 강의를 간단히 마치고서는 질문 타임이 시작된다. 출석부에서 아무 이름이나 찾거나 교단 근처에 앉은 학생을 지목해 묻는다. 가령 "러셀에 대해서 아는 거 하나만 말해보세요" 그 학생이 어버버 답변을 하면 그 옆에 앉아있던 학생에 묻는다. "저 학생의 답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자가 훌륭히 답해도 선생님의 뻔뻔하지만 익살스러운 조롱이 가고, 두 학생 중 한 학생만 어리숙한 답을 내리면 "너무 멍청해요!"라든지 "철학과 아니라 다른 과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라든지 꾸짖음을 듣는다. 그러나 그 공개 비난이 그 학생에게 망신과 창피함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강의실은 웃음이 터진다. 웃음의 강도만큼 학생들은 강의에 집중한다.
질문들이 쉬이 답하기 어렵게 적절히 난도가 높기도 하면서, 선생님의 의도가 그 질문으로 하여금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이라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질문은 따분하고 장황하게 설명한 교재의 한 챕터의 핵심을 꿰뚫었다. 수업 중 "멍청하다"라는 호통을 듣는 게 부끄럽기보다 즐겁고 유쾌했다.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겐 한 번쯤 "멍청하다"라는 비난은 커다란 추억으로 남았을 테다.
질문을 받고 나면 어떤 학생들은 승부욕이라든지 악에 받친다든지 조금이라도 망신을 피해 가려고 아는 지식을 짜내 열심히 답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선생님의 신랄한 비아냥 혹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는 날카로운 꼬리 질문이 이어진다. 학부생들의 얕은 도전은 대부분 무위에 그친다. 단순한 질답이었지만 그 자체는 철학적 논증과 논박이었고 그 과정은 사소했지만 경험은 값졌다.
나도 즉흥적인 질문에 속이 후련한 답을 해보려고 노력했던 학생 중 하나였다. 2학년 1학기 때 들었던 기호논리학은 아쉽게도 B+를 받았다. 그리고 1년 뒤 3학년 2학기에 심화 수업인 논리학특강에 도전했다. A+을 받았다. 열심히 노력했겠지만 논리학특강에서 배웠던 내용들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업 중에 다른 학생들이 철학적 질문에 골탕 먹는 모습을 깔깔거리며 즐겼는지 어떻게 하면 수업 중 쏟아지는 질문에 요령 있게 빠져나갈지 노력했던 기억뿐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게 논리학에 가까워졌다. 모순일까? 아니다. 선험적 인식을 깨달았을 뿐이다. 비록 세상이 논리적으로 굴러가지 않지만 그 선험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선생님께는 천재성이 엿보였다. 논리학 수업이었지만 간혹 다른 철학이나 철학자 언급이 나오면 다른 철학 수업을 하셔도 될 정도로 엄청난 학식과 학술적 박식함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수업에서는 들을 수 없는 간결함과 명쾌함이 있었다. 천재적인 면모가 보이는 선생님에게 빼어난 강의를 사사하는 것은 대학 생활에서 몇 안 되는 쾌락이었다.
김영건 선생님이 강조하던 게 있다. 무엇이든지 안다면 한 두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수이성비판도 한 두 문장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고, 수업 내용을 리뷰하는 질문에 중언부언 답변이 길어지면 잘 모르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병중에서도 수학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경험을 간명하게 블로그에 남겼다. 짧은 만큼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모두 탁월했다.
대학에서 그분의 존재와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대체할 수 없는 귀감이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대학 시절엔 제겐 작지만 소중한 학문적 성취였고 지금은 자아 실존을 뒷받쳐주는 든든한 지적 쾌감으로 남았습니다. 산바람 부는 교정 그리고 햇볕 잘 드는 교단 앞 칠판에서 기호논리학 문제를 풀며 씨름했던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선생님을 오랫동안 추억하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sellars/223200391662
#240516 추가
선생님 블로그에 가족분들이 서강대 내에 기념식수가 심어졌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게시물엔 정확한 장소가 나오지 않아 식수식 사진 3장만 들고 몇 번 가본 적 없는 서강대 캠퍼스를 온통 뒤졌다. 햇볕 잘 드는, 적잖히 조용하고 그렇다고 쓸쓸하진 공간에서 식수를 만났다. 누군가 찾아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캔 커피를 하나 남겨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