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역대급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바비'였지만 한국에선 쩜쩜쩜
한국에선 ‘마스크걸’은 흥행했는데 ‘바비’는 인기가 없었다. 왤까?
한국에 사는 남성이라서 모를 수 있고, 영화적 식견이 부족하거나 이를 해석할 통찰력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질문엔 누구나 고민해볼 수 있고 다양한 답을 낼 수 있다. 그 답을 내기까지 나타나는 고민, 갈등, 딜레마도 이 영화가 주는 쾌감이자 즐거움이 아닐까한다.
나는 영화관에 자주 간다. 상영작 중 대중적 기대감이 컸던 작품이어도 보고(오펜하이머), 예상됐든 안 됐든 흥행 성적이 좋아도 보고(밀수), 평이 양극으로 갈려도 보고(콘크리트 유토피아), 대작의 틈바구니에서 소소한 흥행을 거두지만 평이 의외로 좋은 작품도 본다(달짝 찌근해, 이걸 영화관에서 보다니… 참고로 중립적인 평가임!). 좋아하는 시리즈나 감독,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작품은 개봉하자마자 본다(엘리멘탈). 영화깨나 본다는 난척이 아니라 그만큼 장르 안 가리고 이야깃거리로써 영화를 좋아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유독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를 가지고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개봉 전 주연배우와 감독이 직접 한국에 찾았음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 그만큼 없었으니까. 9월 2일 기준 국내 박스오피스 누적 관객 57만 명이다. 올해 재개봉한 ‘타이타닉’보다 고작 12만 명 많다.
이 영화를 두고 오프라인에서 처음 얘기할 기회는 회사 동료와의 점심 자리였다. 그분은 이 영화를 무척 재밌게 봤다고 하면서 나한테도 봤냐고 물었다. 나는 개봉한 극장도 찾기 어려워서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반쯤 거짓이었다. 왜 한국에서는 인기가 적은 지에 대한 이유를 두고 의견을 각각 내놨다. 그분은 페미니즘이 주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평했고 나는 ‘바비’에 대한 친근감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평했다. 그분은 영화를 보고 내린 진솔한 평이고 나는 영화를 보지 않은 과감한 평이었다. 그분은 꼭 영화를 봐보라고 당부했고 후기도 알려달라고 했다.
며칠 후 ‘바비’는 전 세계 흥행 순위 1위를 갈아치웠다. 우주 명작 ‘해리포터’과 놀란 감독의 역작 ‘다크나이트’ 기록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미국 시장에선 애당초 올해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고 전 세계적으로 13억 4000만 달러 수익을 거뒀고 100년 역사가 있는 워너브라더스 역사상 최대 흥행작이 된 것. 아니 이럴 수가. 영화 시장 큰손인 한국에서 이렇게 조용한 영화가 굵직한 기록을 갈아치우다니. 해외에서 흥행하는 모든 영화가 한국에서도 그에 준하는 인기를 끄는 것만은 아니다. 그 반대 사례도 잦다. 그러나 ‘바비’처럼 극단적인 흥행 차이가 나는 사례는 대단히 낯설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 시내 몇 개 안 남은 상영관 중 하나를 찾아 ‘바비’를 봤다.
‘바비’의 흥행 실패가 정말 페미니즘을 위시한 영화였기 때문일까. 한국인들이 좋아하고 친숙한 마고 로비, 라이언 고슬링이 나오는데도? 해외에서 같은 날 개봉한 ‘오펜하이머’와 콜랩 밈인 ‘바벤하이머’이 등장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을 압도하면서 흥행한다는 뉴스가 들렸는데 왜 사람들은 ‘바비’를 보려 극장에 찾지 않았을까. 영국 가디언은 큰 영화시장 중 하나인 한국에서 유독 이 영화가 고전하는 이유를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들이) 페미니스트로 낙인찍히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만 국한하기 어려웠다. 무관심한 측면도 컸다.
‘바비’가 얼굴을 펴지 못하는 동안 방긋 웃던 작품이 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이다. 공개하기 전부터 관심도 컸고 공개 후 곧장 한국 넷플릭스 1위 작품으로 등극했다. 해외 8개국에서도 1위에 올랐다. 내키지 않는 콘셉트와 분위기라서 처음엔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내게도 입소문을 타고 ’마스크걸‘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들리면서 이틀 만에 ’마스크걸‘을 정주행하게 됐다.
’마스크걸’의 주제 의식은 루키즘(Lookism), 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가 중심이다. 동시에 외모지상주의와 밀접한 관계인 페미니즘과 가부장주의를 그려냈다. 가부장주의 세계관에서 외모로 핍박받는 주인공이 악의 화신으로 흑화해 남성중심적 세계를 성형, 살인, 연대, 모략 등으로 맞선다. 또 가부장주의가 당연시됐던 베이비부머 여성의 아등바등하고 불행한 서사를 그린다. 그 역시 어떻게 악당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며 극은 역설적으로 가부장주의의 피폐함과 내재적 모순을 들춘다. 악당의 복수극은 악의 화신인 주인공 앞에서 무릎 꿇고 회사, 술집, 교도소, 지하실까지 이어지는 어둠의 바비랜드는 막을 내린다.
두 영화는 다른 듯하지만 더 나은 사회가 무엇인지 힌트를 주고 그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깜빡이를 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쪽은 밝고 긍정적이고 다른 쪽은 어두울 뿐이다. ‘마스크걸’에서 등장인물들이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피의자가 되기까지 그 원인 제공은 선명하다. 그리고 그 원인제공의 출처도 분명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불행하게 하는 가부장제, 외모지상주의 같은 그릇된 사회관념이다. 이것에 손가락질하며 나쁜 것이라고 규정한다. ’바비‘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을 위시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주제 의식이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고 계몽주의적인 게 아니라 통합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말이다. ”바비가 무엇이든 될 수 있듯, 여자들도 무엇이든 될 수 있어(Because Barbie can be anything, women can be anything)“라는 문장만큼 “나는 힘 없는 남자야. 그렇다고 내가 여자인가?(I’m a man with no power, does that make me a woman?)”도 중요한 대사였다.
‘바비’는 실패하고 ‘마스크걸‘은 흥행하는 현상을 보면서 무엇이 환기되는가. 사회와 극장가의 간극일까, 여러 사소한 변수가 모여 어쩌다 보니 흥행하지 못한 걸까. 원인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어떻게 읽어낼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힌트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