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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May 11. 2024

응답하라 2024, 헌법재판소!

2020헌마389 등 4개 기후 헌법소원에 관한 이야기

종로구 계동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무렵, 3개 궁궐 주변인만큼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 가득한 동네가 반가웠다. 주요 시설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안국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헌법재판소였다. 입학하기 한 해 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심판이 있었던 곳이었다. 모든 국민이 관심을 곤두세웠던 공간이었다. 투표권도 없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일부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10대에 헌법재판소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 입학 무렵 매우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등굣길 헌법재판소 옥상 위로 불을 때었는지 김이 건물을 잡아먹을 듯이 활활 올라왔다. ‘냉철한 판단을 내린 재판관들도 추위는 못 이기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그 앞을 지나갔다. 


12년 후 2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헌법재판소는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선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심판에서 파면을 결정하면서다. 광화문 앞부터 서촌까지 이어지는 촛불행렬에 함께했다. 사람들은 헌법재판소 앞에 모여, 재판장의 판결을 듣고 환호했다. 한 나라의 절대 권력자가 독립된 기관에 소속된 재판관 9인의 결정에 따라 권력을 모두 잃었다. 물리적인 것은 하나 없이 국가의 권력 구성과 의사결정 구조가 일시에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런 결정에 거스르는 이는 없었고, 모두가 탄핵소추로 대통령의 파면을 겪어본 것처럼 할 일을 착착 해냈고, 별일 없이 국정은 운영됐다.


2016년 11월 26일 광화문 촛불 시위


시간의 굴레랄까, 내 나이 30대에 헌법재판소에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기후위기로 청소년과 아기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비롯한 기후소송 4건을 헌법재판소에서 진지하게 들여다보겠다고 한 것. 헌법재판소는 지난 4월 이례적으로 공개변론을 열었고, 5월 말에 다시 한번 공개 변론을 연다. 귀추가 주목된 만큼 판결도 몇 개월 안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제적으로 여러 국가 및 지방 소속 사법부, 심지어 유럽연합사법재판소 같은 국제 사법기관까지도 기후위기에 각 정부의 기후 대응 수준과 목표가 낮아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청구인의 손을 들어주는 등 상징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다. 전 세계 법관들도 기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권력분립의 한 축으로서 청구인으로 나선 시민들의 목소리에 찬동해 정부에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선 첫 기후 헌법소원이었다. 청구인 법정대리인 중 하나로 동료로 일하면서 존경하지 마지않았던 윤세종 변호사가 배석해 계셨고, 참고인으로는 유튜브 영상을 같이 찍으며 뵈었던 조천호 박사가 참석하셨다. 수십 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온 사전 기자회견은 오래 협력한 분이 업무를 맡았다. 재판관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고, 내가 쓴 편지는 전국의 시민들이 쓴 편지와 함께 헌법재판소 앞에 걸렸다. 현장에서 보고 싶어 방청을 신청했지만, 당첨되지 못해 보조심판정에서 티비로 중계되는 변론을 지켜봤다. 5시간에 가까운 모든 변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구인 측 대리인들과 반대쪽에 앉은 정부 측 대리인들 그리고 4년 가까이 변론을 준비했을 9명의 재판관이 5시간 가깝도록 치열한 심리를 진행했다. 정부 측 대리인은 정부의 기후대응과 기후목표 설정이 법리적 위헌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례적인 공개 변론으로 헌법재판소가 몇 달 안에 최종판결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톰 행크스가 주연인 영화 ‘스파이 브리지’는 좋아하는 영화다. 냉전 시절, 소련 포로를 변호하는 변호인 제임스 도노반 역할로 나오는 톰 행크스 연기와 포로인 루돌프 아벨로 열연하는 마크 라이언스가 그리는 긴장과 휴머니즘이 인상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법과 외교란 무엇인지 잘 깨칠 수 있게 한다. 특히 헌법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하나의 씬은 이 영화의 백미다. 


소련 포로를 변호하기로 하면서 CIA 요원이 주인공 도노반을 미행하기 시작하는데, 도노반은 눈치를 채고 요원과 바에서 독대한다. 요원은 피고인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국가보안을 위해서 정보를 요구한다. 도노반은 비밀유지의무를 깨는 게 아니냐고  지적하는데, 요원은 뻔뻔하게 “애들 장난이 아니다, CIA에겐 룰북(Rule Book, 법)이 없다"라고 답한다. 도노반은 침착하게 본인은 아일랜드계고, 요원은 독일계라는 걸 확인하고 “무엇이 우리 아일랜드계와 독일계를 같은 미국인으로 만들어주냐?”라고 묻는다. 도노반은 “딱 하나가 우리 둘 다 미국인이라고 규정해 주는데, 그게 바로 룰북이고 우리는 이걸 헌법이라 부른다. 우리 둘 다 헌법에 동의하고 그게 우릴 미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전부인데, 룰북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라며 요원 면전에서 시원하고 "고개 끄덕이지 마, 개새끼야"라는 욕을 박고 씩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헌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사노라면 도로교통법, 형사소송법, 노동법 등은 이따금 들여다봐도 헌법은 읽어볼 일 없다. 헌법은 정말로 존재할까? 헌법은 정말로 기능할까? 헌법은 정말로 정의로울까? 


헌법재판소에 방문하면, 펜 한 자루와 헌법이 적힌 작은 소책자를 기념품으로 준다. 손바닥만 한 책에 빼곡하게 헌법 전문이 담겼다. 조그마한 책자 하나에 들어가는 글이 국가를 규정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무엇인지 나열하고 이 문장들은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기후위기 앞에서도 헌법은 똑같이 고고한 우리의 권리를 똑같이 보장할 수 있을까.


지난 4000년 넘는 이 땅의 역사에서 1948년 제헌되고 1987년 현행 헌법으로 나아오기까지, 큰 열망과 희생이 있었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기후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은 이 땅에 살아갈 다음 4000년의 모든 생명의 명운을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 9명의 재판관이 역사적인 결정을 내리길 기원한다. 우리만의 '룰북'도 우리와 미래세대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마련했다는 자랑스러움을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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