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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May 17. 2024

'악성 재고'는 오랜 시간 함께 할 거야

친한 형의 본인상 소식을 듣고


한참 축구를 같이 하던 형이 스포츠용품 판매업에 종사할 때가 있었다. 주말마다 축구 모임에서 형은 종종 팀원들에게 축구 양말이라든지, 축구화라든지, 의류라든지 스포츠물품을 나눠줬다. 제품에 크고 작은 하자가 있어 ‘악성 재고’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하자가 명백히 있는 물건을 판매할 순 없고, 그렇다고 형이 그 많은 용품을 혼자 다 가질 수 없으니 당시에 월급 받을 일 없는 대학생이나 돈이 귀한 사회초년생을 위해 선물했던 것이다. 나도 검은색 나이키 재킷 하나를 받았다. 겉보기엔 전혀 불량은 알아채기 어려웠고, 자세히 봐야 지퍼 달린 부분에 조금 울어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날이 쌀쌀한 계절에 축구하기 전 몸이 데워지기 전에 몸을 풀면서 입기 좋은 옷이었다.


최근 그 형의 부고를 받았다. 30대 내 나이대에서 받는 부고 속 고인은 대개 지인의 직계존속 그러니까 부모 혹은 조부모다. 부고를 받으면 대개 이런 생각이 든다. 유족은 큰 상심을 받겠지만 ‘그럼에도’ 그나마 다행인 건 고인이 대부분 나와 직접적인 친분이 없었던 분이기에 내 슬픈 공감이 가닿는 한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크게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고에 ‘본인상’이라는 글자엔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내 부끄러운 마음이 도망갈 곳 없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 황망이라는 표현조차 이 참담함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어떤 언어 표현이라도 그 기분과 마음을 평가절하하는 듯하다.


교회 청년부 축구팀에서 같이 공을 차며 친해졌다. 나보다 6살 많은 형은, 처음 축구를 같이 했을 때 -그 형이 아마 28이나 29세였을 때겠다- 기억이 생생하다. 형은 공 간수와 방출에 급급한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공을 다뤘고, 자신감 있고 정확한 킥으로 경기를 잘 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거의 매주 공을 같이 찼고,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은 후에도 새로운 축구팀에서도 같이 시간을 보냈다. 축구장까지 가기 애매할 때 형의 픽업도 받아가면서 거의 10년을 같이 공을 찼다. 팀 멤버들은 각자 타지로 취업하거나 결혼하거나 아이가 생기면서 흩어지고 흐지부지되면서 축구할 기회는 이따금 마련됐고, 그럴 때마다 형과 근황토크를 하곤 했다. 공을 차고 나서 밥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영화와 게임을 좋아해서 신나게 떠들곤 했다. 마지막으로 공을 찬 건 작년 12월, 겨울이었지만 그리 춥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에도 헤어지면서 앞으로 종종 더 자주 공 차자는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4개월 만에 단톡방에는 모이자는 메시지 대신 부고가 올라왔다. 장례식은 따로 열리지 않았다.


부고를 전해준 다른 형을 만나 공원을 걸으며 이야길 나눴다. 그 형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얼마 전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좋지 않은 상황을 마주했고, 우울증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친구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있었지만, 슬프게도 끝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형은 세상이 쓸쓸하고 막막했고, 불완전한 현실이 답답했고, 모든 게 밉고, 허망했던 걸까. 


부고를 받고 나서 형의 카톡 프로필을 보니 상태메시지엔 태어난 날과 떠난 날이 표시돼 있었다. 상태메시지는 형이 떠난 날에 수정된 것으로 나온다. 그 숫자를 하나하나 타이핑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만약에 봄날에 다 같이 모여 공을 차면서 땀 빼고 스트레스를 날렸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 1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봉사한 경험으로 다양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주변에 많이 장려하고 다녔는데, 형의 상황을 내가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열심히 치료를 권했을 텐데. 그랬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형이 준 그 재킷은 여전히 옷장에 걸려있다. ‘악성 재고’로 받은 옷은 이제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 기능에 충실하며 겉옷 삼아 운동하기에 매우 최적이다. 완전하지 않고, 결함이 있고, 모두가 원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이 재킷은 수없이 버려지는 물건 가운데서도 긴 시간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더는 악성 재고가 아니었다. 불완전함이 만족과 충분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었다. 이런 깨달음을 형이랑 공 차고 나서 떠들면서 조금이라도 나눴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 생각 없이 입었던 이 재킷에 다른 의미가 생겨났다. 찾아가 애도할 봉안당이 없어 아쉬웠는데, 10년간 같이 뻘뻘 땀 흘리며 공 차던 형을 떠올리고 추모할 매개가 남은 셈이다. 악성 재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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