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하루는 느리게 갔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넘쳐서 흘러내렸다. 상담센터에서 준 감정일기는 시간을 때우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다. 온갖 낙서와 의미 없는 말로 페이지를 채우다 보면,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감정 쓰레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쓰레기는 나름 교하고 봐줄 만해서 버리기 아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호와 닮은 남자의 옆얼굴을 고운 선으로 매만지며 그렸다. 그다음 날은 남자의 눈, 코, 잎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게 하고 사악한 미소로 입가를 찢어 놓았다. 또 어떤 날은 남자에게 어여쁜 광대처럼 화장을 시키고, 눈물이 흐르게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같은 그림에 덧칠을 하다 보니, 일기장의 얄팍한 종이에 구멍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완성된 부분은 종이채로 잘라내어 파일철에 보관했다.
"감정일기는 좀 써보셨나요?"
"아뇨."
"왜 쓰지 않으셨어요?"
"그냥 쓸 것이 없어서요."
심리상담사에게는 너덜너덜해진 감정일기를 보여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그녀가 나는 왠지 정말 싫었다. 중간중간에 나를 다독이거나 격려하는 말을 해줄 때마다 그녀가 더욱 미워졌다. 이렇다 보니 상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잠을 보채는 갓난아기처럼 유치하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곤 했다.
"첫 시간에 헤어진 연인에 대한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그 감정이 때때로 본인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싫어하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않는 거였는데. 절박한 마음에 심리상담에 대단한 해결책이라도 될 줄 알고 털어놓은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뇨, 이제 괜찮아요."
나는 핸드폰으로 상담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덧붙였다.
"이제 생각도 안 나요."
낙서를 하고 상담을 해도 남는 시간에는 구직사이트를 들여보거나 소개팅어플에 접속했는데, 그 둘의 차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가게의 쇼윈도를 구경하며 차마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방랑객이었다. 나 역시 선반 위에 올려진 물건인 주제에, 어떤 가게는 너무 천박해 보여서, 어떤 가게는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그리고 어떤 가게는 나를 받아줄 것 같지 않아서, 그렇게 길거리만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가게 생기면 그곳에서 나의 안식처를 만드는 것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것이 회사이든 남자이든, 달콤한 상상은 언제나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나의 삶은 실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실망을 하지 않으려면 희망부터 걸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헛된 희망을 죽일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