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귀신 들린 집은 회사가 아니었을까? 고민 끝에 6년간 다닌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아직 퇴사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퇴마의 효력을 느낄 새는 없으나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3개월 동안 중단되었던 생리가 시작되었다. 척추를 타고 오는 두통까지도 몸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니, 반갑기만 했다.
문제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었다. 일단 쉬고자 했으나, 정작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는 나였다. 민과는 영영 끝난 것이 틀림없었으니, 나가서 만날 사람도 없었다. 내 쪽에서 조금 손을 놓으면 이렇게 쉽게 끊어질 사이라고 생각하니 미련이 들지도 않았다. 이런 경험이 누적될수록 호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만이 문제였다. 호라면 날 이렇게 쉽게 놓지 않았을 텐데,라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호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지, 그러니 날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라고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속으로 읊조리는 것이었다.
퇴사한 직장에 입사하기 직전에 호와 헤어졌으니, 이미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연을 만났으나, 그중 누구도 호와 같은 자취를 나에게 남기지 못했다. 호의 사진을 삭제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고이 웹하드에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애인은 헤어지기가 무섭게 사진을 몽땅 삭제하였지만, 호의 사진만은 들여보지는 않더라도 안전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다른 애인들은 이름과 얼굴이 금세 흐릿해졌지만, 호만은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이목구비 하나하나 그려볼 수가 있었다.
"일종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찾아간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50분에 10만 원을 청구하면서 도무지 기억에 남는 부분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차마 친구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점만은 좋았다.
"선생님, 저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요. 6년 전에 헤어진 사람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어디 가서 말하기도 창피해요."
"반드시 그 사람을 지금 좋아하지 않더라도 상실감은 느낄 수 있어요.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나는 '상실'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이별'이나 '미련'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니 너무 구질구질해지는 감정이 조금은 고급스럽게 포장되는 느낌이었다. 연애문제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평범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스스로를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애인, 친구, 가족, 그리고 소울메이트를 결합한 모든 것이었다. 호가 내 삶에서 나간 순간부터 난 누군가 생살을 손톱으로 파내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뾰족한 손톱이 심장의 살덩이를 한 움큼 억척스럽게 잡아서 떼어내는 느낌이 생생하게 들 정도로 많이 아팠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그 부분의 살점이 너덜너덜 아린 느낌이었다. 난 6년 동안 묵어서 퀴퀴해진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분에 10만 원씩 내는 상담을 5회기나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