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간의 무게 2

by 파드샤


결국 회사에 가는 데 실패했다. '오늘도 몸이 나아지지 않아서 휴가를 내려고 합니다.'라는 카톡 하나 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사람들은 알까? 카톡 하나를 쓰기 위해 총력을 붓고, 간신히 무단결근을 면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오늘 회사에 못 갔다고 말했다. 엄마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같이 점심이라도 먹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혼자 있는 건 외롭지만, 전화로 몇 마디 말 나누는 것까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였다.


처음 항우울제를 처방받았을 때가 어렴풋이 10년 전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약효가 발할 때까지 기다리니, 난생처음 보는 활기찬 세계가 펼쳐졌다. 마치 하루하루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만나러 가는 학창 시절 버스 안처럼 느껴졌다. 에너지가 솟아올라서 잠도 많이 잘 필요가 없었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면서 놀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길 버스에서 쪽잠을 자도 활기가 넘치고 행복했다. 혹시 우울하지 않다는 것이 이런 걸까?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사는 걸까?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우울증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유전력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질병'으로 발현되기 이전에도 나는 매우 어린 시절부터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그때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감상적이고 간지러워서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우울의 악몽에 빠져들기엔 내가 아는 세상의 모습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아서였다. 가끔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던 우울감이 몇 가지 삶의 사건을 겪으면서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호의 손에 이끌려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호는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최초의 사람이었고, 때가 조금이라도 늦어졌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호가 없는 나만 덩그러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릴 적에 종종 대전에 계신 조부모님 집에 맡겨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이른 오후부터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계셨던 것이 기억난다. 아빠 말로는 아빠가 어릴 적에도 할머니는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와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보다가 방송에서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 우울증이 뭐예요?"


"그냥 정신병을 좋게 말하는 것이야."


잘 모르는 어린아이 마음에도 할머니가 말을 좀 심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하게도 우울증 환자였던 할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한 말이었는지 궁금해진다. 할머니 혈관의 우울의 피는 장남인 우리 아빠를 지나치고, 동생이었던 작은 아빠에게로 향했다.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로 살았던 할머니보다는 남자인 작은 아빠에게 우울증이 더욱 혹독하게 작용했던 것 같았다. 작은 아빠는 어느 회사도 꾸준히 다니지를 못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를 지독한 냉혈한이라고, 작은 아빠는 무능하다고 속 편하게 결론 내렸다. 30대인 지금, 나는 그들의 고통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울증과 동거하게 된 지도 수년, 수면제를 먹기도 애매한 이런 오후엔 엄마에게 전화해서 귀신 이야기해달라고 조른다. 엄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교회 사람들 몰래 정기적으로 무당집을 방문하는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귀신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학을 떼며 성경 구절을 몇 마디 읊다가, 내 반응이 심드렁한 것을 알고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레퍼토리였다.


"엄마 친구가 몇 달 전에 겪은 일이었어."


그녀의 가족은 몇 년 전에 도시 외곽에 예쁜 정원이 달린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햇살이 잘 드는 새하얀 집이었지만, 정원의 커다란 버드나무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같아서 묘하게 으스스한 집이라고 엄마는 평했다. 불행은 서서히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타지에 사는 며느리와의 관계가 악화하여, 아들 내외가 집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막내딸이 가정이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아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남편과도 다툼이 잦아지면서, 그녀는 홀로 집을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역시 이 집이 문제인가 싶어서 처분하려고 했지만,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상하게도 집이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어느 이른 오후,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서 그녀는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살짝 눈을 떠보니, 맞은편 소파에 낯선 여자의 하반신이 보였다. 빨강과 햐양으로 된 줄무늬 원피스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불길한 느낌에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그것'은 그녀와 마주 앉은 채로, 잠자리에 든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가위에 눌린 듯이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원 같은 몇 분이 지나고, 간신히 온 힘을 쥐어짜서 문을 걷어차고 뛰어나왔을 때,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절여져 있었다.


그 일이 있고, 그녀는 당장 짐을 싸고 나와 오피스텔을 구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모든 일이 제자리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좁은 오피스텔을 뭐 하러 구했냐며 투덜대면서도 일찍 퇴근해서 그녀와 외식하러 나가곤 했다. 막내딸은 애인과 헤어지고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게 되었다. 아들은 새 주소로 살림살이를 부쳐주면서, 며느리가 챙겨줬다는 말을 덧붙였다. 결정적으로 2년 동안 매매가 되지 않던 집이 팔렸다고 했다.


귀신 이야기가 묘하게 나를 안심시키는 이유는 불행의 원인이 명확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현실의 우울과 불안의 원인은 대부분은 모호하고 손에 잘 잡히지 않기 마련이다. 이사해서나 이직을 하는 것으로 이 진흙탕 같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호가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달라질까? 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뭐가 더 나아질까? 머릿속에서 답도 없는 의문에 대해 스스로 문제 풀이하며 허송세월하는 나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설] 시간의 무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