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서 일기장을 폈더니 이미 우울하단 말로 가득 차 있어서 일기장에게 미안해졌다. 일기장은 얼마나 내가 한심하고 지루할까? 저 인간은 매일 같은 말을 써도 피곤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까? 일기장을 닫고 괜스레 전화번호 목록을 살펴봤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우울하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상냥하게 들어 주기야 하겠지만, 이런 날 피곤해하지 않을까? 민에게 연락하면 어떨까? 아냐, 아직 그럴 사이도 아니고, 내가 지겨운 여자라고 생각할 거야. 엄마에게 연락하는 건 절대 안 된다. 이미 걱정 많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할 수는 없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저녁 7시 30분이었다. 아무리 일찍 잔다고 해도 3시간 뒤에나 잠이 올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도, 지금 이 시간은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하는 무게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도 다 거짓이다. 돈은 할부로도 갚을 수가 있고, 남이 내줄 수도 있고, 나중에 한꺼번에 상환할 수도 있다. 앞으로 잠들 때까지 3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아니, 만약에 잠이 오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잠을 못 이룰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까 공포에 얼굴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무적이라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나름의 해결책이 있었다. 찬장 깊숙한 곳에서 먼지 하나 없이 보관된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몇 년 전에 불면 때문에 처방받기 시작했던 약이지만, 솔직히 최근에는 불면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수면 시간이 오기 한참 전에 미리 약을 먹어서 강제로 잠자리에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복용하면 몸에 안 좋을 수 있다지만, 수면제를 도저히 끊을 수는 없었다. 나의 우울하고 외로운 시간을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하얀 알약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약 기운이 퍼지는 것이 느껴지고, 지겹도록 나를 괴롭힌 의식이 텔레비전 화면이 꺼지듯 끊어졌다. 꿈속에서 호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휴대폰 화면에 뜬 호의 이름을 보자마자 기쁨에 눈시울을 붉혔다. 호는 아직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메시지를 읽으려고 하는데 자꾸 에러가 나서 읽을 수가 없었다. 에러 창을 끄니 글씨가 뿌옇게 퍼져서 눈을 찡그려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눈을 뜨는 순간까지도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따뜻한 눈물이 관자놀이를 간지럽히듯 어루만졌다. 바로 휴대폰 화면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새벽 4시라고 알리는 글씨만 화면 위에 반짝거렸다. 나는 그대로 베개 위에 뺨을 대고 엉엉 울었다. 호가 보고 싶었다. 호가 나를 보고 싶어 했으면 했다. 호의 따스함이 필요했다. 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귓가에 속삭이던 말이 그리웠다. 하다못해 호에 대한 꿈을 꿨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울하다는 말만큼이나 한심한 말이라서, 게다가 지금은 새벽 4시라서, 나는 내 의식 속으로 뾰족하게 파고드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약을 또 먹을까? 아냐, 그러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서 회사에 못 가게 될 수도 있어. 눈물이 나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연락하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신호음이 들리기가 무섭게 전화 건 사실을 후회했다. 민과는 아직 알아가는 사이인데, 내가 힘든 모습 보일 수 있는 관계가 아닌데. 세 번째 신호음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내가 민과의 관계를 모두 망쳐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새벽 4시에 전화하는 이상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고, 영영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재빨리 민의 번호를 삭제하고 메신저에서도 그의 프로필을 삭제했다.
얼마 전에 알아낸 사실인데, 연락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차단'보다는 '삭제'가 훨씬 효과적이다. 적어도 나 같은 한심한 인간에게는 말이다. 왜냐면 내가 연락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을 터이고, 그 사람 연락처만 모른다면 내가 더는 추한 꼴을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 방법은 나와 로맨틱한 관계를 원하는 대부분 사람에게 통했지만, 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호가 날 포기하지 않고 연락해왔기 때문이었고, 나중에는 내가 호의 번호를 외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호만은 내 슬프고 추한 모습을 성가셔하지 않았다. 약간은 귀찮아했지만, 그런 걸로 날 질려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함에 호의 손을 뿌리치면서도, 뒤에서 날 따라오는 호를 보며 묘하게 안심했다. 물론 그건 호에게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 호는 나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나는 호의 번호를 잊지 못해서 날 차단한 호의 신호음을 주기적으로 듣고 있었다.
호의 연락처가 없어도 번호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호의 사진을 삭제해도 새하얀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가 그려졌다. 호와 헤어진 지 수많은 해가 지났는데도 우유식빵 냄새가 나던 그의 목덜미의 숨결이 생각났다. 이쯤이 되면 난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가 평생 호를 잊지 못하면 어떡하지? 만일 운명이란 것이 있는데 이미 놓친 것이라면 어떡하지? 평생 호의 빈자리만 느끼며 살아가면 어떡하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호와 비교하게 되면 어떡하지? 정말 어쩜 좋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얼굴이 따끔거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6시가 되었다. 인간 몸은 아무래도 30분 이상 울지 못하도록 설계가 된 것 같다. 지쳐서 울 기운도 없고 콧속까지 따가워서 세수하러 일어났다. 이미 해도 떴고, 곧 출근할 시간이니 찬물 세수로 부은 눈을 가라앉혀 봐야겠다. 2시간 뒤에는 뽀송뽀송하게 화장된 얼굴로, 태연하게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여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었다. 수많은 전화와 이메일 속에 파묻혀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겠지. 그렇지만 그 안에 민은 없을 것이고, 호도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나는 찬물을 더욱더 세게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