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회사에서 운영하는 퇴직 임원 사무실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과거 함께 근무했던,
지금은 무려 78세가 되신 선배 부사장님을 만났다.
그분은 명예롭게 퇴직하셨고,
회사 안팎에서 인정을 받았던
‘모범적인 성공 케이스’로 기억되는 분이다.
그 선배님은 반가운 표정과 함께,
한편으론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눈빛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운동해라.
공부해라.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라.
종교 생활도 좋다.
그리고 인생 3막은 정말 시간이 많다.
그 시간을 슬기롭게 잘 써야 한다.”
진심 어린 말들이었다.
그분 나름대로 정리된, 지혜로운 인생 3막의 방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화를 나누며,
내 마음 한쪽에 작게 흔들리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분처럼 똑똑하고 명석하고, 경험이 풍부한 분이
지금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곳에 쓰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지금은 비교적 고요한 시간 속에
그 지혜와 경험을 세상과 공유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아깝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단지 선배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고요하게, 그러나 고립된 채 살아가게 되진 않을까?”
“내 안의 경험과 통찰이 사회와 단절된 채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안다.
나는 아직 에너지가 있고, 열정이 있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나는
‘혼자 있는 삶’이 아니라,
‘쓰임 받는 삶’을 원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내 경험을 전하고
내 통찰을 나누며
누군가의 방향이 되어줄 수 있는 삶.
그게 바로 내가 걷고 싶은 인생 3막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번 비자발적 퇴직은
내가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운명의 리셋 버튼일지도 모른다.
회사의 임원으로서 정점을 찍고 내려왔지만,
나는 지금부터 삶의 또 다른 정점을 새로 그릴 수 있다.
그 정점은
직함이 아니라,
영향력의 깊이로 완성되는 곡선일 것이다.
나는 ‘고요한 여생’을 꿈꾸지 않는다.
나는 ‘의미 있는 여정’을 원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쓰임”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이 마음이,
내 인생 3막의 철학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