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간다는 것은 버텨낸다는 것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 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
어제 ESG 강의 중,
한 교수님이 낭독하신 이 짧은 시 한 편이
묘하게도 가슴 깊이 들어왔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그 짧은 구절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이 한 줄에서
문득 나의 지난 27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공장에서 시작해 본사, 해외, 연구소를 오가며
나는 늘 가장 치열한 영역 속에서 일해왔다.
노사관계, 조직문화, 리더십, 안전관리…
누구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았던 복잡한 현장과 구조 속에서
나는 ‘문제 해결자’로, ‘조율자’로, 때로는 ‘방패막이’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뿌리는,
늘 한 가지였다.
열정.
"저 사람은 열정 하나로 버틴다."
그 말이 나에겐 칭찬이자 운명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은 때로
주변의 불편함이 되었고
그 불편함은 경계가 되었고
그 경계는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벼락’이 되었다.
퇴직.
본의 아니게 맞이한 이 시간.
그저 무너지는 일처럼 느껴졌던 순간.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그 모든 걸 이기고 나서야 대추는 붉게 익는다."
내 삶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 수많은 태풍 같은 갈등과 대립,
벼락처럼 쏟아지는 판단과 오해,
견뎌야 했던 부딪힘과 외로움.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던 수많은 현안들.
때로는 해결의 기쁨
때로는 절망의 쓰라림.
그 모든 것을 나는,
이미 한 번씩 이겨내며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한 번 붉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성장’이라는 말을
좀 다르게 받아들인다.
성장은
더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안으로 익어가는 것.
지금 나는
어쩌면 ‘대추 한 알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는 거침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시간을 농익히는 일.
그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일지도 모른다.
저절로 붉어지는 건 없다.
그래서 오늘도 묵묵히,
내 안의 바람과 천둥과 벼락을 껴안고,
나는 익어가는 중이다.
붉게,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삶이란 익어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