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마무리 못한 논문 공부하다.
서울 외곽의 한적한 식당.
창가 자리로 봄볕이 스며들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원 선배, 이 교수님과 마주 앉았다.
평소에도 조용히 응원해주던 분.
오늘은 나의 혼란과 고민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진심으로 털어놓은 자리였다.
비자발적인 퇴직 이후,
복잡한 감정과 끝없는 생각들이 내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내가 잘못한 건 뭘까,
앞으로 뭘 해야 하지,
이대로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지금까지 쌓아온 걸 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볼까.
매일같이 반복되던 혼잣말들.
그런 나를 조용히 듣던 이 교수님이
조금은 단호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논문이야.
그 모든 시나리오, 잡념, 흔들림을 덮고,
논문 하나에 몰입해보게.
그게 자네 인생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길이 될 걸세.”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같았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과학종합대학의 ‘노사공동 ESG’ 과정을 추천해주셨다.
내 논문 주제에 딱 맞는 내용이고,
실무와 학문을 연결할 수 있는 귀한 배움의 자리라고 하셨다.
교육비는 무려 500만 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묘하게 마음이 정리되었다.
“그래.
지르자.
돈이 아까워서라도,
아내에게 미안해서라도,
이번엔 끝까지 해보자.”
이건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삶의 다음 단계를 여는 500만 원짜리 결심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듯 깊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 운명이야.
회사 다니면서도 바쁜 와중에
코스웍까지 마쳤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
만약 석사만 하고 그쳤다면,
지금 퇴직한 시점에 박사 과정을 다시 시작하려면
얼마나 걸렸겠나.
그 모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 지금,
이건 하늘이 준 기회라네.
지금이야말로 터닝포인트야.”
그 말 한 줄이
수많은 혼란을 정리해주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지만,
오히려 더 큰 길로 이어지는 준비된 우회로일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봄바람이 가볍게 불었다.
가슴 안쪽까지 시원하게 스며드는 그 바람에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괜찮아.
이건 시작이야.
그리고, 아직 나는 하나도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