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22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송정리역에서 군용 열차에 몸을 실어 잠깐이나마 정들었던 광주를 뒤로하고 떠났다. 송정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있는 1 보충대로 가는 것이다. 오후 늦게 대구에 도착했다. 낯설지 않은 곳이다. 1 보충대에 들어가 약 1주일가량 대기했다. 4월 초였던 것 같다. 특명이 났다. 전방으로 가란다. 봄이지만 전방에는 추워서인지 방한복장으로 출발했다. 교통비는 지급되지 않고 부대도착하는 날까지 의 식량을 단체로 수령했다. 교통비도 없고 해서 대구역에 나와 팔아서 돈으로 나누어 가졌다. 도착신고일까지는 3일인가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의논했다. 이제 전지로 가면 다시 살아서 집에 갈지 죽어서 갈지 모르니 일단 집에 갔다가 부대로 가자고 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3일 후 오후에 대전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고향으로 향했다. 모두가 호남지방이라 대전역이 적합했다. 집 떠난 지 10개월 만에 집으로 가는 것이다. 2,3일 정도 지연되겠지만 초년병이라서인지 겁도 없이 오직 집에 가고 싶은 일념으로. 그때도 지금과 같이 군인이라 해도 군용 열차 아닌 민간열차에 무임승차할 수가 없다. 요령껏 타고 가는 것이다. 영산포역에 도착하니 오후가 되었다. 돈도 없어 점심요기도 못하고 쌀팔아 나눈 돈으로 버스를 타고 성전에서 20리되는 집에까지 걸어서 늦게 집엘 도착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전방부대로 가면서 집에 잠깐 다녀간다고 했다.
4월이라 계절적으로 농가에서는 양식도 바닥이 날 때라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다. 모처럼 자식이 왔으니 꾸어다가 밥을 해주셨겠지. 이틀간 쉬었다가 집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피난 내려온 누님이 병중에 있는 것을 보고 갔는데 어데 갔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군에 간 며칠 후에 병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공동묘지에 묻었다는데 부친께서는 아리켜 주시지 않으셨다. 일곤아저씨와 함께 묻었다는데 끝내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다. 공동묘지 어데인가에 묻혀있겠지. 벌초 한번 못해주었으니 지금은 한이 된다. 가족들을 작별하고 떠나니 이제 가면 다시 살아서 올지 기약 없는 떠남이라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떠났다. 버스를 어데서 타고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산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해 질 무렵에 대전에 도착했다. 역전여관에 13명이 합숙을 했다. 마지막 떠나는 밤이라 추렴해서 술을 한잔씩 했다. 사과장사 아주머니가 와서 장난도 치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군용 열차에 서울로 향했다. 그 당시는 교통이 나빠 열차 편이 좋지 않았다. 대전에서 목포 간, 대전에서 서울 간, 경부선도 마찬가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오후가 되었다. 우리가 가야 할 부대의 위치도 모르고 막연히 가는 것이다. 3사단 사령부가 화천에 있다는 것만 알고 출발했으니 여하튼 열차로 춘천까지는 가야 한다. 춘천에서 전방으로 가는 트럭이면 한국군, 미군 가리지 않고 손을 들고 세워준다. 민간차는 전방에 들어가는 차는 없었으니까 군용차는 무조건 태워준다. 화천 방면으로 가는 차에 타고 가다가 도중에서 내리고 또 갈아타고 몇 번을 되풀이했다. 왜 그때는 질서도 없었고 아무리 군대라지만 무조건이다. 물어 물어 대전을 출발 3일째 되던 날 밤늦게 3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등화관제를 해서인지 영내는 컴컴하다. 야전천막이 쳐져있는데 천막 안에서 약간씩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험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단사령부에 보충중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병과참모부에서 관리했었다. 우리는 떼 지어 사령부 내 이 천막 저 천막을 기웃거리며 통신부를 찾아 헤맸다. 겨우 찾아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아래 장병들이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북쪽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며 포성이 울린다. 아- 이곳이 전쟁터구나. 이제 우리도 전지에 왔구나 싶었다. 우리가 특명 지를 내놓고 전입했음을 신고했다. 우리가 지연도착했다고 노발대발이다. 참모가 화가 났다. 괘씸죄로 연대로 보내란다. 연대본부에도 두지 말고 대대로 내보내라는 엄명이다. 전시에는 전지이탈은 즉결처분감이다. 우리도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해도 전시가 아니더라도 처벌대상이다. 어떠한 조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집엘 갔다 왔으니까 말이다. 그날 밤은 통신중대 천막내무반에서 자고 다음날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23 연대 전속되어 갔다. 23 연대는 다행히도 예비부대로 후방에서 교육받고 있었다. 3대대 통신소대는 약 30명 정도 있었는데 소대장 갑종간부 후보생출신 임소위(후에 대전 통신수신소 중위 때 교통사고로 사망(목포출신)), 내 계급이 하사였지만 제일 졸병이다. 선임하사관과 각 반장들이 다 일등상사였다. 조장들이 이등상사, 중사들이 식사당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전반에 배치되었다. 전방에는 18 연대와 22 연대가 주 저항선 고지에 배치근무하고 있었다. 화천군 백암산(1179△)에서 좌측능선 끝단까지 방어하고 있었다. 좌측부대는 8사단이 있었고 수도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3사단과 연한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훈련이다. 무선반, 가설반, 교환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받는다. 그해(52년) 4월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으로 롯드장군 포로에게 피랍사건이 있었고 정돈전선은 교착상태에 휴전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전입한 지 약 한 달 정도 되었는데 갑자기 3대대로 전출되었다. 졸병이라 영문도 모르고 짐을 쌌다. 3대대로 갔더니(소대장 김봉거 소위) 오정환이가 있어 그래도 반가웠다(고향이 영광) 그는 가설반에 있었다. 나는 무전반에 들어갔다. 그때쯤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했다. 가을에 진지교대가 있어 우리 23 연대와 22 연대가 교대한 것이다. 백암산에서 949 고지까지가 우리 연대 배치구역이다. 155마일 전선 중에서 중부와 중동부가 가장 험한 지형이다. 고지의 남쪽은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고 험했다. 그 반면에 북쪽은 완만해 아군의 공격은 힘들고 적의 공격은 쉬운 지형이다. 그래서 방어에 어려웠던 것 같다. 부대이동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진다. 진지에 들어가는데 북한강을 건너서 들어갔다. 진지교대를 하고 능선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봤더니 희미하게 적진능선이 바라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적진이다. 우리 무전반은 능선 후사면 호에 설치하고 Antanna를 가설했다. 그리고 연대와 시험통신을 마쳤다. 그리고 각 중대와 FM무전기 시험교신을 마치고 상시교신을 대비했다. 조금 있으니 북쪽에서 대남방송이 시작됐다. 부대 교대한 것을 방송하는 것이다. 부대명과 부대장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첩자가 분명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처음이라 무서웠다. 중상 사들은 경비대 출신들이었고 그 외들도 대개 전투를 해봤기에 무서워하지 않는다. 후방에서 교육받는 것보다 좋단다. 우리는 처음 대하는 것이라 겁이 났지만 이제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이곳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