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효진 Mar 31. 2016

차도는 스피드를 내지 않는 쪽이 위험하다

들어가며

한 번을 까였던(?) 브런치 작가 신청이 성공한 것은 11월의 셋째 날쯤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이러한 곳이 존재한다는 친구의 추천이 있었다. 나름대로 끄적인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이 급했던 그때의 나에게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메일이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조마조마했다. 부장에게 이러저러한 기사를 쓰겠다며 발제 보고를 할 적의 떨림이라기보다는 가고 싶은 회사에 넣을 자기소개서를 쓸 때의 불안감이었다. 붙여 주시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하렵니다, 이게 아니면 더 이상 내게 기회 따위는 없을 듯한. 진로를 영상에서 글로 급선회하면서, 쓰고 싶은 것은 뭐든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자만 아닌 자만이 있었다. 확신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최대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면서 주제와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내놓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끝끝내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됐지만, 하는 일은 외려 글쓰기와 멀어졌다. 쥐꼬리 만한 월급과 맞바꿨던 것은 내 글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한 줌의 체력과 택시비도 줄줄 새 나갔다. 6개월 하고도 나흘 동안, 두 통 분량의 명함은 부지런히도 어디론가 흘러들어갔지만 나는 여전히 그다지 영향력 없는 기자 1인이었다.


이런 말들을 주워섬기며, 무언가를 다짐하는 글을 적겠다고 브런치에 들락였던 것이 2015년 12월 31일이었단다. 석 달이 지난 후 접속해 보니 마지막 자동 저장이 저 날짜였다. 그때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 구석 소파에 앉아 뭐라도 완성해 보려다가 실패하고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다. 운 좋게도 괜찮은 조건의 회사에 들어갈 기회가 왔고, 그것을 잡았고, 그래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이다. 당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내 재주를 인정해 주고 날 예뻐해 주는 직장. 밥벌레 취급을 당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던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덤이었다.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허술한 커리어를 지닌 내게 걸맞은 특수한 고용 형태가 가끔은 여전한 불안함을 주기는 하지만, 오늘까지도 나는 열심히 일했고, 가열차게 농땡이도 쳤다. 돈 모을 생각할 틈이 있을 정도로 그럭저럭 산다. 목표인 1년 근속 이후에도 다닐 마음이 들 지는 미지수다만.


딱 3개월 만에 부러 브런치에 들어와 꾸역꾸역 첫 글을 완성하려고 하는 이유는 오늘이 내 수많은 마음의 고향 중 한 곳인 율전동 파스쿠찌 영업 종료일 이라서다. 2012년 6월부터 이 곳에 다녔다.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한 가짜 졸업식 후, 엄밀히 따지면 수료생 신분으로 방황하던 나는 아직 방송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상태였다.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까마득한 2008년 겨울 학과 논문상을 받았다거나, 싸이나 트위터에 쓰던 줄글과 쪽글 정도로 충분히 자존감을 채울 수 있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오래되고 크고 무겁기까지 한 LG 노트북을 양 어깨에 번갈아 매고 이곳을 왔다 갔다 한 지 3일 만에 졸업 선물조로 넷북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그 달 말쯤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글쓰기에 의무도, 재미도 생겼다. 잠시 소원했던 때도 있었지만, 자소서를 포함해 내가 썼던 글의 대부분은 여기서 나왔다. 처음 ‘인턴기자’라는 직함을 달게 됐을 때도, ‘시민기자’가 됐을 때도, 여전히 백수로 하릴없이 놀고먹을 때도, 어엿한 기자 명함을 손에 쥐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싼 값에 오랫동안 담배까지 피울 수 있는 공간을 쓰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도,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여길 다니면서부터다. 돈까스집, 만화방, 노래방까지 이 동네에 정을 붙이게 해 준 건 팔 할 이상이 이 공간 덕이다. 버스로 왔다 갔다 하다가 걷기 시작했고, 운동 삼아 집을 나오더라도 발걸음은 괜히 이곳으로 향했다. 몰래 흡연실에서 담배만 피우고 나가는 얌체짓을 한 적도 있었다. 그놈의 정부 정책 때문에 온 카페에 흡연실이 사라진 후 잠시 발길을 끊었다가 돌아온 탕아처럼 이곳의 2층 한 켠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아르바이트생들과는 이미 낯이 익었고, 단골손님들의 얼굴까지 익숙해질 정도였다. 그런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막판에는 한 주에 네댓 번까지 여기를 찾았다. 집에서 키보드를 잡을 때보다 편해지는 마음 때문에 대체할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몇 대항마도 있었지만 끝내는 이곳을 선택하게 되는 날이 많았다. 모든 친구들을 여기 불러 모았고, 그동안 세 대째의 넷북을 갈아치웠다. ‘내가 쓴 것’을 떠올리면 글보다도 이 공간이 먼저 선명해진다. 공연히 센치해지지 않아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서운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많이 혼자였고, 자랐고, 충만해졌던 시간은 전부 여기서 보냈다.


그럴싸한 대체재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이제 이 동네를 찾을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을 내 새 글을 받아줄 공간의 시작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언젠가 어디서 봤던, 차도는 스피드를 내지 않는 쪽이 위험하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항상 무언가를 시작하게 했던 이 공간 덕에 차도에 올라선 나는 이제 속도를 내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굳이 여기의 마지막을 지키며 혼자만의 의식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질투의 화신’ 두고 벌인 KBS의 물귀신 작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