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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Jan 07. 2017

백발의 장난꾸러기를 기리며

아들 없는 친척집에 양자로 들어갔던 그는 평생을 논과 밭에서 살았다. 누구보다 근면했던 농부는 운 좋게도 아들딸 골고루 4남매를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호인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식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그가 일군 땅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못 해도 읍내로 나가 독립했으며, 개중에 머리가 좋은 것으로 동리에서도 유명했던 막내딸은 수원까지 나가 고등학교를 마쳤고 유일하게 서울 소재 여자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뭐가 돼도 될 것이라 믿었던 그 딸년은 졸업도 맡기 전에 별 볼 일 없는 회사원과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네 명의 아들딸에게서 아홉 명의 손주들이 꾸준히도 태어났다. 자식들에게는 호랑이 이상이었던 그가 손주들에게는 천사 같았다. 하얗게 센 머리에 형형한 안광을 한 장난꾸러기는 매번 손주들을 울리고 웃겼다. 어느덧 아버지가, 어머니가 된 자식들의 사이도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어린애들처럼 싸우고 금세 화해했다. 이 대가족은 철마다 구름떼처럼 모여서는 웃고 떠들곤 했다.


그러나 일생을 일 밖에 모르던 농부의 몸은 점점 고장나기 시작했고, 노력만으로 넓혔던 그만의 영토는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남부럽지 않게 자라줬던 자식들 중 몇몇은 겪어본 적 없던 비참함과 마주했고, 여유가 사라진 그들 사이에는 서운함이 쌓여 균열을 만들었다. 농부를 닮아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던 형제들의 다툼은 스케일도 커졌다. 몸 곳곳에 인공장치들을 달아야만 할 정도로 자신을 소진시키며 그저 열심히 살았던 농부는 늘그막에 몇 번이고 몰래 가슴을 쳐야 했다. 병든 몸에 노기를 실어 자식들을 다그쳐봐야 그들과의 사이만 벌어질 뿐이었다. 여기까지가 농부의 막내딸년이 낳은 내가 아는 그의 역사다.


나를 늘 메주라 부르곤 하던 외할아버지는 내가 사람 말귀를 알아 듣고 난 후부터 줄곧 당신이 죽으면 울 것이냐고 물어왔다. 유년 시절에는 조부모가 세상을 떴는데 울지 않는 년이야말로 에지간히도 매정한 것이라는 정서가 디폴트였기에 그 질문 자체가 내게는 무척 이상했다. 하지만 8년 전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가 암으로 병원에 누워 있을 적에도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친구와 압구정에서 놀다가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태연했다. 중간고사를 핑계로 입관이며 발인은 커녕 겨우 몇 시간 정도를 장례식장에 남처럼 머물렀다. 나에게 못 한 것은 없지만 마음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서로 서운할 것 없는 사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었다.


지난 목요일 새벽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전날 네 시 쯤에야 겨우 눈을 붙였던 나는 여섯시 쯤 엄마가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며 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잠에 빠졌다. 딱 오 분이 지나고 엄마가 집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젖은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잠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한 시 쯤에야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십 년은 더 된 듯한 그의 사진을 보고나서 외할아버지의 짓궂은 웃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메주덩어리 같은 년. 할아버지 메주가 뭐야? 예쁜 거야. 언니 오빠들에게 내가 할아버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듣고 난 다음에 서러워서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외갓집은 다섯 살의 나도 서른 한 살의 나도 메주라고 부른다. 막상 그 별명을 붙인 장본인은 찾아갈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귀여워서 그랬던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병든 육신이 버거워 얼른 가고 싶다며 울던 그는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비치는 내게 미움 받기 싫어서 그렇게 필요 없는 해명들을 늘어놨다. 기자가 됐다고 첫 명함을 내미니 귀가 먹어 볼륨을 키워 놓은 TV를 보며 팽목항에 가 있을 내 걱정을 했다고도 들었다. 외양간에 소와 돼지와 닭과 개와 토끼들이 사라지는 동안 관심 없이 머리만 굵어진 손주년은 그 조그만 한옥집에 들어설 적마다 한 시간을 못 버텨 집에 가자고 눈치를 줄 뿐이었는데 말이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막바지에는 평생을 보낸 그 한옥집에 그렇게도 가고 싶다 말했지만 그는 끝내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앞에 놓인 뜨끈한 무국의 수증기가 눈에 젖었다. 젊고 살아있는 나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는 없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소한 욕망조차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과 자식, 자식과 자식 사이에 벌어진 틈도 채 메우지 못했다. 가족으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의 원통함이 오열로 대신 터졌다.


몸이 병들어서도 꼬장꼬장함은 버리지 못해 병원에서도 도통 컨트롤이 되지 않다 보니 묶여 있던 적도 있었다. 수의에 싸여 누워있는 그는 너무나도 얌전한데도, 열 여섯개의 매듭이 그를 꽁꽁 묶었다. 어느새 굽어 펴지지 않던 허리는 꼿꼿해졌지만, 그 모습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이 타 없어지는 시간마저 서둘렀다. 두 시간으로 예정돼 있던 화장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가죽만 붙어 있던 조그마한 몸이 한 줌의 뼛가루가 돼 있는 양이 너무도 서글펐더랬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놓인 전동 휠체어와 니트 방석에 다시 눈물이 솟았다. 네 명의 아들딸과 아홉 명의 손주들은 그가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신들을 맞이하던 침대를 두고 둘러 앉아 다시 예전처럼 울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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