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21

27일 만의 출국

by 나효진

2016년 12월 25일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월 1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이 빡세질 참이었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2016년을 정리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에 있을 적에 불의의 사고(핸드폰에 된장국 흘림)를 당했던 날 공교롭게도 대표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좀 혼날 것 같았다. 거기에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이야기도 나오겠지, 하고 회사로 갔다.


대표와 독대하자마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갑자기 내가 누구보다 돈을 더 받는다는 화제가 나왔는데 오늘날 이 시점에 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결국은 그쪽이 나에게 여태껏 은혜를 베풀어 줬다는 것이었다. 닥치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회사 대표 주제에 부모 행세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계약 관계가 아니던가.


서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에서 10분 만에 갈라서는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됐다. 끝까지 다소 지저분한 태도여서 나도 화가 바짝 오른 채 회사를 나왔다. 회사 앞 카페에 들어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데 대표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붙잡는 것도 아니고 놓아주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무튼지간에 나는 당장 실업자가 돼더라도 그 회사에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로 일본 생각이 났다.


짧으면 2월, 길면 3월부터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좀 길게 일본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은 1월 뿐이었다. 그런데 1월에는 설 연휴가 끼어 있다. 당장 1월 초에 가는 것은 오바같았고, 그 즈음이 적당했다. 설 연휴에는 비행기삯이 미친듯이 뛸 것이기에 딱 그 전주에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다. 한 이틀 정도만 시부야에서 자고, 나머지는 요요기공원의 그리운 집에 묵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적으로 설날 전은 부쳐야 하기 때문에 27일 돌아오려 했지만 친구가 끼어들면서 다소 계획이 변경됐다. 21일 출발, 하루만 시부야, 28일까지 남은 6박7일을 요요기 근방에서 머무르는 것이 확정된 후에는 비행기 티켓 가격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퇴직금이나 얼마 안 되는 저금으로 버텨야 하기 때문에 전처럼 호화롭게는 돈을 쓰지 못한다.


연휴 전주여도 비행기 티켓값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실시간으로 3만원이 오르는 것을 본 후에는 바로 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유심에 착신전환서비스까지 확실하게 마치니 진짜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친구들에게 라인으로 차근차근 연락을 돌렸다. 너무 한 번 본 사이도 있어서 거기까지 연락하기에는 민폐 같아 고민했다. 영화 관계자인 미치코상이 연하장을 보내 주었길래 회사 그만둬 버렸다고 전했다. 한 달 내내 친구들 선물을 고민하다가 술과 라면, 김과자와 담배 등을 챙겼다. 캐리어 확장으로도 무리였다. 옷은 최소한으로 챙기고 선물 넣는데 집중했다.


대망의 21일,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마치 통근버스를 타는 듯 익숙했다. 비행은 야간비행이 확실히 운치있는데 아쉽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출국 수속을 마쳤다. 비행기의 창가 자리도 늘 타는 버스 자리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2시간 남짓 시간이 흐른 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유심을 갈아 끼우려는데 이럴수가... 핀을 안 가져온 것이었다. 미리 도쿄에 도착해 있는 친구와 만나야 하기에 유심을 지금 장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다가 근처에 포켓와이파이 대여 및 유심 판매를 하는 곳이 보여서 핀을 빌릴 요량으로 갔다. 그런데... 유심 핀을... 무려 500엔에 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쓴 바가지였다. 심지어는 이번에 산 유심이 일본 유심이 아니라 태국 유심(10개국 호환 가능)이었는데 인터넷이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그냥 시부야로 가는 리무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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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 마크시티에 내려 다행히 빨리 짐 보관소를 찾았다. 딴 보관소는 500엔이면 된다는데 여긴 무려 800엔이나 받았다. 그러고는 시부야 외국인 전용 프리 와이파이 ID를 부여받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장소를 잡았다. 친구는 친구와 스카이트리에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별로 땡기지는 않았지만 만나는 게 우선이었기에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친구가 내릴 역을 잘못 알려줘서 또 한참 헤매고 말았다. 그래도 역마다 와이파이를 잡아가며 연락한 끝에 오후 두시 반 경에 친구들과 만났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부터 먹어야 했다.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히츠마부시로 점심 메뉴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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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었지만 엄청나게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차즈케까지 해서 뚝딱 한 그릇 해치운 후에 스카이트리 전망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런 관광객스러운 것은 할 생각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도 없었다. 외국인 전용 티켓은 1000엔이 비싼 대신 줄을 거의 서지 않아도 됐지만 돈이 아까워서 그냥 일본인들이랑 한 시간 기다렸다. 원래는 대여섯시간도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 그렇게까지 야경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나으 솔찍헌 심정이다,,,


한 시간 동안 한국인 두 명과 일본인 한 명이 신나게 떠들었다. 한국어를 전혀 쓰지 않고도 재미있었다. 친구 관계에서 나는 보통 츳코미를 넣는 입장이지만 내 일본인 친구들과는 뭔가 어디까지 장난을 쳐도 되는지 그런 부분들이 힘들었다. 그런데 이 일본인 친구와는 사이에 친구가 한 명 끼어 있어서인지 말 하는 것이 곤란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 친구 시오링은 임신부인데도 우리보다 체력이 좋았다.


몇 층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엄청 빠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때는 정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황혼과 함께 본 후지산은 경건한 느낌까지 줬다. 그리고 금세 어두워지니 야경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기준 2000엔 넘는 돈을 주고 볼 건 아니었다. 시오링은 뭐든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카페에서 음료 한 잔 씩을 사서 마시고 시부야로 돌아갔다. 시오링과는 체류 기간 동안 한 번 더 보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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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로 돌아와 내 짐을 찾고 숙소로 이동하는데 와... 에어비앤비가 또... 숙소 위치 제대로 안 박아놔서 추워 죽겠는데 한참을 헤맸다. 가는 길에 횡단보도가 없는 구간도 있었는데 최소 25kg은 되는 짐을 든 채 지하도로 건너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계단 중간에서 잠깐 쉬는데 남자분이 다가와서 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웬만하면 맡기겠는데 이건 진짜 존나 무거워서 괜히 들었다가는 한국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거의 빼앗다시피 짐을 낚아챈 남자분은 반대편에서 짐을 올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미안해 할 까봐 그랬는지 쿨하게 "오야쓰미"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후로 그 지하도를 보기만 하면 그 분 생각이 난다.


아무튼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지난해 친구와 같이 갔던 시부야 카페로 향했다. 카페 도착 전 늘 들르는 드럭스토어에서 면세 범위까지 꽉 채워서 쇼핑도 했다. 카페에서 폐점 전까지 하루를 정리하다가 나와서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친구를 맺은 가게로 가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만석이었다. 하릴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다 폐점이라며 쫓겨났다. 관광객처럼 면세 봉투를 들고 시부야 거리를 헤매다가 편의점에서 술을 사가지고 와서 팬텀싱어 노래를 들으며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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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오전 1시쯤 다시 술집 탐방에 나서 볼까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양치 세수 하고 발만 씻었다. 소녀스러운 짓들을 하다가 잠들었다. 친구는 다음날 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