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4~2017.6.24 ①
거의 2년 만에 밀린 도쿄 이야기를 적는다. 마지막에 올린 글을 보니 생각보다 성의없이 적혀 있어서 놀랐다. 당시를 떠올려 보면 거의 난생 처음으로 술에 취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잤던 기억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히라마가 와인 한 병을 땄고, 그걸 네다섯명이 나눠 마셨고, 나는 거의 못 마셔서 이리에상이 대신 마셔줬고, 그가 드물게 집까지 데려다 줬었던 기억인데. 그걸 고작 세 문단 정도로 축약한 걸 보면 감독이라는 인물이 당시 내 안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감독과는 화해를 했다. 그때의 심정이라고 한다면, 어쨌든 나는 그 동네에 얼굴을 비춘 지 6개월 남짓 되는 이방인, 굴러들어온 돌이라면 그는 십수년을 박혀 있던 돌이다.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 싫으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듯한 찜찜한 기분은 계속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을 그만 둔 지 어언 6개월이 돼 가고 있었고, 더는 깰 적금도 없어 남은 건 마이너스통장 뿐이었다.
찜찜이고 나발이고 당장은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활비가 급해지니 직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곳저곳 전화를 돌려 겨우 면접 기회를 얻었다. 그래도 잘못 살지는 않았는지 어느 정도 빽이 통했다. 1차 실무 면접이 끝나고 2차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만약 2차 날짜가 잡히면 면접 보고 바로 도쿄로 튈 작정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그리로 불렀던 걸까.
그러던 중 2차 면접 날짜를 받았다. 면접 전날까지 스카이스캐너를 뒤적거리다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의 티켓을 발견했다. 김포-하네다 노선, 저가항공도 아니었는데 20만원대의 항공권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런 티켓을 볼 날이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쌌다. 출발까지 채 24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과감히 카드를 긁었다. 여태껏 한국 여행사를 끼고 계약했을 때와 달리 너무나도 간단히 결제가 끝나서 불안에 떨기는 했지만...
도심공항을 통해 짐을 부치고 면접을 봤다. 보통 30분 정도면 끝날 것이 길어져 나의 시선은 자꾸 벽에 붙은 시계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당장 출근은 어렵다는 뜻을 전하며ㅋㅋㅋㅋㅋ 서둘러 김포로 향했다. 역시나 성수기 직전의 공항은 한산했고 나는 코딱지 만한 면세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2주 만의 야간 비행. 비행기 안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비우며 점점 취해갔다.
시간대가 애매하야 다른 비행기와 도착 시간이 겹쳤는지 입국심사 줄이 소름끼치게 길었다. 하네다의 프로가 된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이 시간이 지연됐고, 겨우 리무진에 오르니 시간은 벌써 열한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라인을 켜니 어디냐고 빨리 오라고 난리가 나 있었다.
이번에 빌린 에어비앤비는 3곳. 첫 번째 집은 다소 목적지와 떨어져 있었다. 어느덧 더워진 날씨 탓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집은 사진에서 본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침대가,,,,, 매트리스였다,,,,,, 그래도 공간은 제법 넓어 잠시 쉬면서 옷을 갈아 입고 선물을 챙겨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향했다.
가게 앞으로 마중을 나온 치쨩과 포옹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감독 이하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려는 듯 말을 걸기에 목례 한 번 끄떡 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해할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효진은 나랑 싸웠지?"
"싸우다니?"
싸우다니. 네가 구라쳐서 내가 일방적으로 삐진 것 뿐인데 싸우긴 뭘 싸워. 그래도 생각한 것만큼 분위기가 구리진 않았다. 이번 여행을 즉흥적으로 계획하면서 치쨩에게 연락을 했었는데, 감독이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상관 없으니 네가 신경 쓸 일은 없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루 동안 읽씹을 당한 것도 사실은 기분이 나빴다. 그런 일을 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감독을 대할 만큼 무딘 인간이 아니라는 마음이 당시에는 컸다.
대충 준비한 선물들을 건네고 한 잔 마시고 나니 새벽이었다. 이날은 이 바 주인이 치쨩이 일하는 바에서 2시부터 바텐더를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모두 그리로 이동했다. 한참 노닥거리다보니 키라의 생일이었다는 걸 알고, 간단하게 생일 파티라도 하자 싶어 그를 불렀다. 그러나 날이 밝아서야 키라가 도착했다.
예거 한 잔씩을 돌리고 샴페인을 땄는데, 키라가 그때까지 남아있던 여자 손님한테 실례를 해서 샴페인 세례를 받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ㅋㅋㅋㅋㅋ 키라가 여자분한테 몇 살이냐고 물었고, 서른 몇 살이라는 답을 듣자마자 초면에 "ババだな!(아줌마잖아!)"라고 해 버리는 바람에 ㅋㅋㅋㅋㅋ 열받은 여자분이 뚜껑 열린 샴페인 병을 키라한테 냅다 던져버렸다 ㅋㅋㅋㅋㅋ 진짜 뭐하는 놈이었는지...? 지도 33번째 생일 맞은 주제에 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는 체류 기간 동안 이 소식을 미친듯이 소문내고 다녔다. 아침 일곱시 쯤 됐나. 친구들과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평일 아침 취한 채로 구글맵에 의지해 헤매이는 내 구두소리만이 시끄럽게 골목에 울렸다. 감독과는, 아직 화해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