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
영남제분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과거 대기업의 안주인이 사위의 외도 사실을 알고 그 상대를 청부살인한 참극이 벌어져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었죠. 청부살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한데, 억울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통화 내용을 엿듣던 장모에게 상대를 추궁당한 사위가 면피를 위해 이종사촌동생의 이름을 댔는데, 그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장모는 폭력배를 사주해 당시 여대생이던 A양을 살해했습니다.
영화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이하 특별수사)의 모티프는 바로 이 영남제분 사건입니다. 이 밖에도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사건 등이 영화에 녹아 있습니다.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소재인 ‘갑질’과 이를 통해 피해입은 서민들의 이야기가 ‘특별수사’에서 다뤄집니다. 극 중 대해제철의 며느리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택시기사가 경찰 출신 변호사에게 구명 편지를 보내며 벌어지는 일들이 주요 내용입니다.
배우 김영애가 대해제철의 숨겨진 수장이자 가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사님 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출신도 평범한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며느리를 고깝게 보던 중 청부살인이라는 살벌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며느리가 마지막으로 탔던 택시 기사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웁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악역이죠.
그러나 김영애는 여사님 역을 악역이라고 보지 않았다는데요. 그는 지난 5월 31일 열린 ‘특별수사’의 기자간담회에서 “특별히 악역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그 인물에 충실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표현이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라며 수줍게 웃어보였죠. 직전 시사회에서 김영애의 무서운 모습을 봤던 때문인지 그 미소조차도 의뭉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이에 대해 김영애는 “여사님 역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어요”라며 “어려서부터 왕국의 여왕이라고 할까요? 스스로 하는 행동에 선악의 잣대를 갖다댄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영화 속 여사님은 세상에서 상식적으로 통하는 선과 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일 것이라는 발상에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얼마나 이 역을 편하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관객들이 느낄 통쾌함이 배가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어느 역할이든 그랬습니다만 타당성을 부여합니다”라고 덧붙였죠. 촬영을 하다가 “여사님이 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라고 주변에 물을 정도로 역에 깊이 몰입했다는데요. 이런 것이 진짜 메소드 연기가 아닐까요? 착한 역할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악질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영화 안에는 택시기사의 딸이 더러운 신발로 대해제철 내실의 양탄자를 밟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때 여사님의 표정은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습니다. 사람 이하의 것을 보는 듯한 그 차가운 시선은 관객들까지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죠. 김영애는 이 대목을 언급하며 “이 양탄자가 얼마 짜리고, 어느 때 골동품이고 그런데, 그 값진 양탄자에 뭘 밟고 다녔을지도 모를 운동화 신고 올라오는데 당연히 싫지 않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뭔가 설득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여사님은 아랫사람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고, 이들을 ‘그것’이라고 칭하곤 합니다. 그 덕에 ‘베테랑’의 조태오, ‘리멤버’의 남규만도 능가할 엄청난 카리스마의 악역이 완성됐습니다. 그런데 배우 김영애는 여사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수줍은 미소를 띄웠고, 우아하고 천천히 답변할 말들을 골랐습니다. 보는 사람들까지 눈 앞의 이 배우가 여사님인지 김영애인지 헷갈릴 정도였네요. 연기하는 본인은 한 번도 악역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사 속 네로 황제를 닮았다고 자평한 이 여사님 캐릭터, 오는 16일 극장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특별수사’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