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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Oct 18. 2016

한국에서 가장 여자 이야기를 잘 하는 감독

영화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감독

요즘 한국 영화계를 단적으로 묘사하는 시쳇말이 돌고 있습니다. 바로 ‘알탕 영화’인데요. 남자의, 남자를 위한, 남자에 의한 남자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속칭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뚝심있게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자 감독이 있습니다. 이재용 감독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재용 감독은 터부시됐던 여성의 욕망 분출을 멋진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영화화해왔는데요. 이정재, 김미숙 주연의 ‘정사’나 배용준, 전도연 주연의 ‘스캔들 - 조선남여상열지사’가 그랬죠. ‘여배우들’은 그가 만든 여자 이야기 중 최고의 화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가 또 한 번의 여자 이야기, ‘죽여주는 여자’로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습니다. 노인 성매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에서는 트랜스젠더, 장애인, 다문화가정 구성원 등 사회 도처의 소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기구한 사연을 통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문제들이 하나 둘씩 폭로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열린 ‘죽여주는 여자’의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상영이 끝난 후, 전에 없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담담히 바라보며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이재용 감독에 재주와 50년 배우 인생에서도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연기했을 배우 윤여정에 대한 찬사로 보였습니다.



‘죽여주는 여자’의 내용을 보면 제목이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에 대해 이재용 감독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쓰다가 윤여정씨하고 통화를 했는데, ‘이 여자는 이런 여자다’라고 줄거리를 설명하다가 문득 떠오른 제목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노인들 사이에서 서비스가 죽여준다고 소문난 성매매 여성이면서도 그들의 요청에 의해 죽음에 조력을 하게 되는 소영(윤여정 분)의 모습을 포괄할 수 있는 제목으로 느껴져 가제로 썼었다는데요. 처음에는 가벼운 제목처럼 생각돼 걱정도 했었다네요.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성매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유도 궁금해졌습니다. 이재용 감독은 “이 영화는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사실 윤여정씨에게 들은 건데, 극 중 소영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세 노인들이 자살하는 노인들의 전형적 유형이라고 해요. 이 영화를 통해 이런 결론들이 있으니 따라하라든가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감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었지만, 지금이라도 주변의 다양한 문제들이 공론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영화 속에는 뉴스 등 흘러가는 배경을 통해 조계사에서 칩겨하던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이나 얼마 전 안타깝게 숨을 거둔 백남기 농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요. 안그래도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죽여주는 여자’는 이들을 그대로 극 속에 담았습니다. 이재용 감독은 “시나리오를 2개월 동안 썼고, 준비 2개월, 촬영 2개월을 하는 동안 해당 사건들이 우연처럼 겹치더군요. 조계사와 약속하고 촬영을 하려는데 마침 한상균씨가 거기 계셨어요”라고 전했습니다. 오히려 피해가는 것이 어색하고, 현재성과 역사성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빼지는 않았다네요.


이재용 감독과 배우 윤여정의 환상적 앙상블 덕에 ‘죽여주는 여자’는 흥행 순항 중입니다. 100세 시대가 재앙인지 축복인지 모를 오늘날, 묵직한 주제의식을 따뜻한 이야기에 담아 내며 작은 영화의 힘을 유감 없이 뽐내고 있는 ‘죽여주는 여자’를 보며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심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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