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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웃음과 눈물로 만든 얘기

영화 ‘계춘할망’

by 나효진

배우 윤여정과 김고은이 할머니와 손녀로 호흡을 맞췄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영화 ‘계춘할망’에 대한 관람 욕구가 상승하는 것을 막기 힘들 듯합니다. 제목만 봐도 대강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대번에 짐작되고, 영화가 촬영됐다는 제주도의 예쁜 풍광 역시 신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작품들을 즐겨 보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화 속 클리셰들이 현실 속 대부분의 삶 한 켠 묵은 이야기를 가져다 쓴 것이니까요. 우리는 이 뻔함과 익숙함에 공감하고, 이를 담은 작품들을 사랑해왔습니다.


지난 2일, ‘계춘할망’의 언론시사회가 열렸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취재진이 꽉 들어찬 객석에서도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윤여정이 연기한 계춘할망의 얼굴에서 저마다의 할머니, 어머니를 떠올렸던 까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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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은 영화 속에서 극진히 보살피던 손녀를 한순간 시장에서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제주도 해녀로 분했는데요. 입고 벗기도 힘든 해녀복을 입고 제주도 바다를 누비는 것은 확실히 액션 연기에 가까운 고생이 수반됐을 듯했습니다. 거기다 치매에 걸린 연기까지 실감나게 소화한 그의 살신성인에는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사 이후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도 특유의 솔직한 입담으로 회장을 웃기고 울렸습니다. 간담회가 시작되기까지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려 미안해 하는 출연진 사이에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질문과 답변의 중간을 치고 빠지는 윤여정의 노련함이 돋보였습니다.

극 중에는 할머니 윤여정과 손녀 김고은이 소위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이 마주 담배 연기를 뿜는 광경은 사실 우리나라 정서상 아직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대목이죠.
이에 대해 윤여정은 “스물 아홉살 때 화가 천경자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어요”라며 “그때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셨는데, 담배를 너무 멋있게 피우셔서 ‘저도 담배 한 번 피워 볼까요?’라고 했었어요. 그러니 ‘피우소. 혼자 담배 피우는데 동무해 준다니 얼마나 고맙소’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멋졌어요. 제가 늙어서 누군가 담배 같이 피우자고 하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천경자 선생님처럼 멋있게 할 가락은 안 돼서…(웃음)”라며 묻어 두었던 추억을 꺼내 놓았습니다. 이 추억을 통해 해당 장면에서 나이차를 뛰어 넘는 우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명이었죠.

영화 속에서 불량배로 등장하는 류준열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에 ‘계춘할망’을 연출한 창감독은 “류준열이 tvN ‘응답하라 1988’ 주인공 맡기 전에 이 영화의 오디션을 봤었는데, 굉장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윤여정은 “이제 와서 그런 얘기 하면 좀 그렇죠. 이미 대세인데”라고 농담 섞인 핀잔을 주며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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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역을 맡은 김고은에 대한 애정도 유쾌하게 표현했습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배경과 김고은이 잘 어울렸다는 평에 창감독은 “김고은만 예쁘게 찍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닌데, 제일 비싼 렌즈를 썼어요. 조금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라고 답했는데요. 윤여정은 “김고은이 안 예쁜 걸 억지로 예쁘게 찍은 것처럼 얘기한 것 아니예요?”라며 발끈한 듯한 시늉을 해서 좌중을 전부 폭소케 했습니다.

본래 도회적 이미지를 맡아왔는데 시골 할머니로 변신한 데 대해서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제작자에게 ‘여태 그런 이미지였는데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닐까요?’라고 물었더니, ‘도회적 이미지가 소멸되셨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재밌게 말하는 젊은이를 만나서 말려든 것 같아요. 도전이 됐나요, 안 됐나요?”라고 반문해 다시 한 번 웃음을 주기도 했죠.


그러나 이날 간담회에서 윤여정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와 함께 등장하던 장면에 대한 언급이 나왔는데요. 이에 윤여정은 다소 격앙된 말투로 “엄마가 93세신데, 이 영화를 찍는 중에 사고가 나셔서 병원에 계세요. 이 영화를 찍느냐 마느냐 할 정도였는데 수술이 잘 되셔서… 집에는 못 계시고 실버타운에 계세요”라고 털어 놓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습니다.

잠시동안 감정을 추스르던 그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슬프고… 엄마가 어떻게 되신 건 아녜요. 1년 전 쯤 헤어지게 된 거죠. 영화 보면서 슬펐던 것은 제 모습이 그냥 엄마 모습이더라고요. 늙은 딸이 늙은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제가 너무 착잡했습니다”라고 말한 뒤 다시 눈물을 쏟아 안타까움을 줬습니다. 휴지로 내내 눈물을 훔치던 윤여정은 결국 마지막 인사도 전하지 못했죠.

‘계춘할망’에는 이처럼 윤여정이라는 한 사람이 갖고 있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억은 영화를 보는 이들이 갖고 있는 것과도 비슷한 모습이라 공감을 자아냅니다. 영화 속에서도, 이를 두고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도 그 눅진한 감정이 와 닿았습니다. 윤여정과 꼭 닮은 영화 ‘계춘할망’은 오는 19일 개봉합니다.


[사진] ‘계춘할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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