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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자 Mar 25. 2021

아이돌을 보며 생각하는 나의 14년 차 우울증 경력

너네가 커리어 쌓을 동안 나도 우울을 쌓았네

나의 우울증 데뷔 무대

오랜만에 TV를 보는데 학창시절 아이돌들이 나와서 이런 말을 한다. "14년 차 아이돌 ㅇㅇㅇ입니다." 데뷔 시기가 2007-2008년이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아이돌이 많았고 음악 방송이며 연말 시상식이 삐까번쩍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그 때는 내가 처음 우울증을 발견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울감은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우울감은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씨앗은 나의 탄생부터 있었겠지만, 그게 적극적으로 발현된 게 고등학교 때다. 나는 고등학교 입시시험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두통이라는 희안한 증상을 겪었다. 그럴 리 없을테지만 나는 그 난생 처음 편두통을 내 우울증의 시발점과도 같은 것으로 여긴다. 고등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우울증이 시작됐고, 그 시절 겪었던 주변의 자살을 비롯하여 내 우울 커리어(?)의 정점이었던 시기가 고등학생 때였기 때문이다.


상당히 오랜 기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나의 우울증은 환경이 만들었다고. 한국의 입시제도와 인격과 존중이 없는 문화를 탓해야 한다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이 아닌 어느 다른 환경에서 자랐어도 우울증을 피하지 못했을 거란 판단이 든다.



아이돌에게 타고난 끼가 있다면 나에겐 타고난 우울감

14년 간 상담을 받는 동안 내게 다소 놀라운 깨달음의 순간(?)이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우울감이 타고난다는 의사의 얘기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절망적인 소리인가,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자라오면서 똑같은 상황에서도 나처럼 우울해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 가족을 포함해서 - 을 보았고, 그런 순간에 그들의 무심함에 상처를 받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점은, 사람에게 모두 타고난 기질과 성격이 있는 것이고 우울감도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아이돌들이 외모, 춤, 노래에 재능을 타고나 듯이, 나는 남들보다 어느 정도 높은 "우울감 스탯"을 타고 났을 거라는 말. 의사의 모든 말을 믿는 편은 아닌데, 이 말은 곱씹을 수록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은 의외의 위안이 되었다. 우울의 악순환은 우울해하는 나를 비관하고  우울에 빠진다는 것이다. '우울감 기질론' 내게  닿은 뒤로는 나를 비관하는 부분이 조금 적어졌다. 생긴 대로 사는  자책할  없잖아? 누구는 키가 작게 태어나고, 누구는 외향적으로 태어나고, 나는 조금 우울하게 태어났다는데. 남들보다 자주, 쉽게 우울한 내가 "열등하고  나서" 그런  아니라 그냥 남들보다 우울을 쉽게 느끼도록 설계되어 그렇다는 것이  자책감을 덜어주었다.



14년 차 우울증 환자의 업적이란

방송에서 14년 차 아이돌들이 그들의 지난 디스코그래피와 무대들을 읊었다. 그들에겐 업적들이 많았다. 흑역사든 레전드든 비디오와 앨범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 쌓인 연차만큼 퍼포먼스에 능숙해진 실력과 체력, 벌어들인 돈이야 말할 것도 뭐 없고.


같은 나이의 "영앤리치" 아이돌들을 보면서 부러웠다. 동시에 나에게 14년 차 경력이랄 게 뭘까 생각하니, 우울증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우스워서 조금 소리를 내서 웃었다.


"14년 차 우울증 환자"라는 나의 타이틀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것. 그게 내 경력이고 업적이 아닐까. 예전의 나였으면, 이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타이틀에 다시 우울해졌을 것이다. 아니 물론, 지금도 이 타이틀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받아들인 것 같다 - 우울은 내 생에서 사라지진 않을 테고, 내가 살아있는 한 우울증 연차는 쌓일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는 매 년 갱신되는 우울증 연차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업적이란 것을. 나는 이것을 주기적으로 리마인드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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