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점의 관찰자로서 쓰는 코칭 에세이
나는 종종 20대 초반에 이미 정상에 오른 프로선수들을 만나고 지켜본다.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오래 바라보면 전혀 다른 결이 드러난다.
빠른 성공은 재능의 총합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일찍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긴장과 고립의 시간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생존의 압력, 혼자 버티며 익힌 조기 성숙,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내면의 규칙들이 그들을 빠르게 앞으로 밀어왔다.
그들의 이야기와 표정, 성취를 대하는 방식에는 공통된 그림자가 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나의 오래된 모습과 마주치곤 한다.
한때 나는 스스로를 끝없이 수리하며 살았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를 '고쳐야 한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20대 초반에 성공한 선수들을 바라보면, 그들의 내면에서 익숙한 문장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의 내면에는 각자 공통된 질문들이 숨어있는 것 같다.
질문을 따라가 보면 보이는 것들
그 질문은 종종 말로 드러나지 않는다.
표정의 미세한 움직임, 인터뷰에서 조심스레 빼놓는 단어들,
성공을 대하는 태도의 단절과 이어짐 사이에서 조용히 떠오른다.
나는 그 질문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들도 아직 완전히 언어로 붙잡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공은 분명한데 왜 마음은 늘 긴장된 채 멈춰 있는가?"
"어디까지 가야 진짜 안전해졌다고 느낄 수 있을까?"
"잘해왔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해야만 할까?"
"지금의 나와 진짜의 나 사이에 얼마나 설명되지 않은 거리가 남아 있는가?"
이 질문들은 명확한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위치에서 한 발 떨어져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에 더 가깝다.
관찰자로서 내가 발견한 흐름
그들의 질문을 가만히 듣다 보면,
내 질문도 함께 떠오른다.
"나는 왜 그토록 오래 자신을 수리하려 했을까?"
"그렇게 수리하려 할수록 왜 더 불안해졌을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그 패턴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했을까?"
정답 같은 것을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그 과정을 지나오며 하나의 흐름을 발견하긴 했다.
사람은 어떤 순간에 이르면
'고쳐야 한다'는 믿음보다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작은 욕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 욕구는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하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이다.
그 마음이 아주 작더라도,
그때부터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기 어렵다.
나도 그랬고, 요즘의 선수들도 그런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리의 시대가 끝날 때 비로소 떠오르는 질문들
그 질문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의 나에게 정말 필요한 힘은 어떤 종류일까?"
"나는 무엇을 지키며 살고 싶은가?"
"성취가 아닌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자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과거의 수리 패턴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패턴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살아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살짝 비추어 준다.
그 가능성은 인생의 방향을 갑자기 바꾸지는 않지만,
이미 마음속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새로운 흐름을 드러낸다.
여백을 남겨두며
나는 파란 점의 관찰자로서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거나 규정하고 싶지 않다.
누구의 질문이든 그 질문은 그 사람이 스스로 풀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그들이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내면의 감각이 미세하게 깨어나는 구간을 지나고 있는지를
먼 거리에서, 때로는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질문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
그 변화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모양으로 열릴지는
각자의 여정이 답할 것이다.
나는 그 여정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사람으로 남아
그들의 새로운 결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