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dade, 번역되지 못하는 그리움

우리의 상실의 시대

by 모멘트

세상의 모든 언어들은 다른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없는 단어나 표현이 꼭 몇 개씩은 존재한다. 비슷한 단어를 통해 '대략적으로' 이해될 수는 있어도 그 단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에 대해 피부 속 깊숙이 느끼고 있는 그 미세한 여운까지 전달하기엔 역부족이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자면, 한(恨)의 정서를 이야기할 때의 '한' 같은 단어가 그럴 것이다. 이 단어를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민의 정서에 대한 배경 없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언어는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너무나 많은 것들(감정을 비롯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묘사 등)을 언어가 가진 특유의 성질로 규정짓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그 역할은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언어'라는 틀을 통해 입 밖으로 뱉어버리는 순간 오히려 그 언어에 갇혀버리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글 번역기에 넣어서는 절대로 해석될 수 없는 언어들에 매료된다. 다른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없는 단어들은 왜인지 모르게 더 진짜 같다. 더 날 것의 언어 같은 그 느낌이 좋다. 브라질에서 배웠던 포르투갈어 단어, 'Saudade(사우다지)'도 그중 하나다. '향수(Nostalgia)'나 '그리움' 등으로 번역될 수는 있겠으나 뭔가 2% 부족하다. 브라질과 연관되는 삼바춤, 끊이지 않는 축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자유로움, 신나는 보사노바 음악 등의 이미지만으로는 이 단어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가슴 한 구석을 찡-하게 하는 그들의 슬픈 음악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다.




최근 그 한 단어가 다시 내 맘 속에 쿡- 박혔다. 무엇인지 모를 그리움이 찾아왔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우울했던 10대 끝자락의 잠 못 이루던 많은 밤들을 나는 이불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그 당시 신해철이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으며 보냈다. 반말, 직설과 욕설이 심심치 않게 난무해서 때론 선을 넘나드는 대략 난감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들처럼 방송의 시작과 끝을 멋진 멘트로 장식하는 것 따위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방송 분량을 채우기도 전에 그냥 끝내버리기도 했고, 요일별 코너가 있어도 음악만 주야장천 듣고 싶은 밤에는 아무런 멘트 없이 음악만 2시간 내내 틀었다. '마땅히 이래야 한다', 혹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틀 속에서 살아왔던 대한민국의 순진한 10대 소녀에게는 충격적인 방송이었다. 그는 청취자들의 적나라한 고민들을 더 적나라하게 상담해줬다. 세상에는 하찮은 고민들이란 없었다. 정말 별 사연들이 다 있었는데, 그런 고민들을 훈계 형식이 아닌 단순히 이 세상을 조금 더 먼저 살다 간 한 사람으로서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해주는 식이었다. 모든 이들은 늘 각자의 위치에서 불안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지만, 특히나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젊은 청춘들의 정신적 불안정함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그 당시 가장 편하고 안정적인 선택에 대한 답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인생을 조금 먼저 살아본 사람들에게 SOS를 청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청춘들에겐 언제나 세상이 뒤집어져도 늘 인간으로서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는 옳은 길을 제시해줄 진짜 어른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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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황했던 그 어두운 밤들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현재, 나는 그때 고민 사연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 이름 모를 청춘들의 마음으로 다시 이불속에 몸을 웅크린다. 아직도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하는 듯하다. 더 잘생기면 삶이 편하고, 할 수 있는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세상일을 모르는 철없는 소리라고 한다. 안정된 직장을 가질수록 더 좋은 일이며, 갖고 있는 것을 놓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이나 잘 움켜쥐고 있으라고 말한다. 이 불안한 시대의 많은 청춘들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려했다가도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결국 기어이 다시 그 뜨거운 것을 목구멍 저 아래로 꿀떡 삼킨다.


그 어느 때보다 그저 살살, 무리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이 그립다. 내가 살아보니,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 중 더 중요한 것들이 많으며, 인생은 단편물이 아닌, 하나의 장편영화이니 자신의 속도대로,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진짜 어른들이 정말로 그립다. Saudade, 이 단어가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움과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로 온통 뒤섞여서 나의 작은 숲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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