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나'로 살았던 시간들에 대하여
그러니까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사건은 단순하지만 긴 이야기다. 내가 여기에 도착한 후 곧장 향한 곳은 이 집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이제는 환갑이 된 한 여자가 서울생활이 싫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1996년부터 2006년까지, 홀로 그리고 또 아주 많은 사람들과 30대의 굵직한 시간을 보낸 집. 그 안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던 곳. 키가 작은 집주인의 키에 맞춰 그만큼 낮게 만들어진 나무 바 테이블..
그렇게 2006년부터 10년이 넘도록 굳게 닫혀있던 시간만큼이나 빛이 바랜 그 오래된 바에 앉아봤다.
그 시절 그녀가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을 때 이 곳에 앉아서 했을 생각들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창밖 풍경을 보며,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보며 느꼈을 감정들에 조금은 감정 이입을 해볼 수 있었다.
그때의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불안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과 삶의 불확실한 모든 것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마음들이 매일 송글 송글 맺혀가지 않았을까. 그녀가 한참 이 공간에서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때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날들 중 하나는 그녀와 함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는 날이었다. 결코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요리와 예술에 관련된 책과 클래식 CD들을 한 바구니 가득 담아 골랐다.
그걸 그렇게 흐뭇해했다.
그런 세월들이, 그 널찍하고 낮은 바 테이블 밑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스크랩해둔 각종 요리 레시피들과 뭐 하나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컵들, 피아노 잡지들, 지인들에게 받은 손편지들, 각종 전시회 팜플랫들.. 그리고 조각조각 흘려놓은 짧은 일기들.. 이름 모를 이로부터의 오래된 연애편지까지.. 물건들이 그 시절 그 사람을 오롯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바에 앉아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서 정리하다 보니, 그녀가 이 곳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결코 돈을 버는 일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살고 싶었던 것'이지 않았을까. 그냥이 아니라, 그녀의 방식대로... 그래서 그녀의 취향대로 물건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직업이 건축가도, 음악가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공간 속에서 마음껏 그림과 건축, 요리, 음악에 빠져서 살지 않았을까..
직업은 한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지표가 되기도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찍힌 명함을 상대에게 내밀기 전에, 당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하다. 나라는 사람과 내 직업이 일치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직업이라는 분류 속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답게 살다 보니' 어느새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이 되는 일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힘주어 사는 것보다 종종 나의 본능과 기분이 원하는 일들을 간과하지 말고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내가 몰랐던 그녀의 삼십 대를 엿보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