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와 그녀가 떠나보낸 사랑에 대하여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후-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것은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떠나고 난 후 텅 빈 호텔방에 홀로 허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장만옥이 결국 굵고 뜨거운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고 마는 그 장면이 나올 때 즈음이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이기에 그 둘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지를 애잔하게 지켜보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이야기의 흐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스무 살 무렵, 보는 사람까지 덩달아 기분 좋게 만드는 젊음의 생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웬만큼 사소한 것에는 그의 시간을 단 일초라도 허투루 쓰지 않을 것 같은 철저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 웬만한 영화나 문학작품들을 꽤 넓게 알고 있었으며 각 작품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간략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꾸준하고 고요한 열정을 갖고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글을 쓰고 싶어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자신이 진짜로 관심 있는 것을 찾아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는 사실도 그녀에게는 그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명료함,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하는 생각의 명료함과 명쾌함이었다. 소녀와 숙녀 사이 경계 어디쯤 서있는 나이답게 그녀는 스펀지처럼 많은 것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흡수했으나 아직은 분별력이 약해 모든 판단 앞에서 갈팡질팡 할 때 그는 그녀가 느끼는 모호함이 분명한 형태를 찾아가도록 도왔고 그것은 그녀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그가 완전히 틀린 경우라도 상관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이 다 좋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동경했고 존경했으며 그녀 내면의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데 모여 점점 커지자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 더 적합한 방법으로 설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 또한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녀의 사랑과 그의 사랑의 존재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늘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기에 아주 평범한 어느 날은 홀로 들떠 하이톤으로 '그냥 우리 결혼부터 해버릴래요?'라고 말했는데 남자는 그 무거운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버릴 수 있는 그녀의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녀의 사랑의 끓는점은 언제나 그의 사랑의 그것보다 훨씬 낮았기에 그녀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마음이 뜨겁게 끓어올랐지만 그는 그런 그녀에 비해 늘 한 템포 더 신중했기에 그 둘 사이에는 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있었다. <화양연화>에서 아파트 가운데 벽을 하나 두고 사는 장만옥과 양조위의 거리처럼, 밤늦게 택시 안에서 나란히 앞을 보고 앉은 그 둘의 간격처럼, 늘 옆으로 나란히는 있을 수 있어도 하나로 포개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꽤나 단단하게 먹어야 하는 그들처럼.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처럼 서로는 서로에게 너무나 특별한 존재였으나 어쩌면 그 의미를 너무 진지하게 부여했던 걸까. 상대방의 모습을 가감 없이 직시하기 전부터 그들은 그들이 욕망했던 상대방의 모습을 하나의 정해진 이미지 속에 대입하려 했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언제나 불안과 내면의 불만족을 초래한다는 것을 그들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그가 욕망하는 모습으로, 그녀는 그를 그녀가 바라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 둘은 부단히 도 상대방을 몰아붙였고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 속 불편한 순간들이 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행복의 기억도 오로지 '찰나의 순간'들로만 존재했다. 어느 평범한 날 햇살 좋은 야외 카페에 앉아 그에게 쉴 새 없는 질문들을 하는 그녀를 애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씩-웃던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순간, 같이 차를 타고 탁 트인 도로를 달리며 서로 신이 나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던 해방의 순간, 영화관에서 깜빡 졸던 그녀의 고개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동시에 같이 쿵-하고 뛰었던 그의 심장박동... 너무나도 짧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결국 둘 사이의 불편한 시간은 점점 길어지더니 순간이 몇 분이 되었고, 몇 분은 몇 시간, 그리고 며칠씩이나 지속되던 어느 날 서로에게 아픈 상처를 가득 남긴 채 그녀는 그를, 그리고 그는 그녀를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다 쏟아냈고 그 또한 그녀에게 그동안 못했던 모진 말들을 해댔다. 그렇게 그와 그녀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그녀는 <화양연화>에서 왕가위 감독이 원래 촬영까지 해두었던 베드신과 마지막에 앙코르 와트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재회하는 장면을 실제 영화에서는 모두 편집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랑에는 상대방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앞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사랑에는 상대가 직접 볼 수 있는 정면뿐만 아니라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랑의 측면도, 뒷면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랑의 뒷면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가슴 아픈 말들로 그를 저 멀리 밀어냈음을. 그녀가 생각했던 속 시원한 '결말'이 없을 때 오히려 어떤 사랑은 오직 순도 높은 사랑의 감정으로 그녀에게 영원히 남을 수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