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점잖은 사람들의 특징 5가지
긴 하루였다. 겉으로 봤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런데 뭔가를 잘못 먹어 체한 것처럼 마음 한편이 불편하게 묵직했다. 그날은 몇 년 만에 반갑게 만난 사람들과의 식사자리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나 결국 집에 돌아오는 길 내게 남은 것은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이 아닌, 그날 오전보다 더 답답해진 마음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왜 나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 가지 못했을까. 반가운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벌거벗겨져 굳이 내보이지 않고 싶었던 나의 속살을 보여주게 된 민망하고 불편한 상황에 처해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점잖은 사람들이 참 없다."
'점잖은 사람'이라니. 내가 생각해 놓고도 자주 쓰는 말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이보다 더 나은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점잖은 사람이 그리운 날이었다. 너무 친해서 어딘가 무뎌진 관계보다도 나를 속속들이 몰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한 그런 괜찮은 사람이 그리웠다.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점잖은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왕 그리워하게 된 김에, 내가 생각한 그들의 특징을 몇 가지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무려!) 1877년에 출간된 '신사 숙녀의 에티켓: 미국 사회의 매너와 옷차림에 대한 매뉴얼' (The Ladies' and Gentlemen's Etiquette : A Complete Manual of the Manners and Dress of American Society)이라는 책에서 저자 Mrs. Duffey는 독자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무례하거나 선을 넘는 질문을 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상대방을 언짢게 할 수 있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예를 들어 대화 상대의 남자 형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가 아닌, "너의 오빠(혹은 남동생)가 잘 지내고 있길 바라"라고 말하는 식이다.
If you want to know how your friend's brother is, do not say,
"How is your brother?" Say, "I hope your brother is well."
Passive-aggressive nosiness is far more acceptable than brazen, well-intentioned curiosity.
너무나 직접적인 질문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 마치 진실만을 답해야 할 것 같은 다그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내가 보는 것과 당신이 보는 것이 다른데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런 질문은 진솔한 대화를 끊기게 한다.
질문뿐만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너무 직접적인 코멘트 또한 마찬가지다. "피부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어? 무슨 일 있었어?" "이번에도 연봉협상이 안됐는데 거길 뭐하러 계속 다니냐?" 같은 특히나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코멘트 등 또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그냥 얕게 웃으며 넘길지 몰라도 그런 말들은 안 하느니만 못 한말이라는 것을 말을 뱉어놓고 조금 후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유연하다. 생각이 유연하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그것은 그 사람을 결론적으로 더 풍요롭게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일단 그 생각을 듣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나와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상대도 내가 이야기할 때 들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며 이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다. 반면에 자의식이 너무 강하거나 본인을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에 지나친 확신이 있는 경우에는 상대가 하는 말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상대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거의 90% 이상의 확률로 상대는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게 아니고서야 내가 하는 이야기가 상대에게 먹히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는 굳이 더 지속할 필요가 없기에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난다.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는 한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한동안 경력이 단절되었던 친구가 꽤 큰 회사에서 잡 오퍼를 받은 것에 대해 모두가 축하를 하는 자리였는데 이제는 본인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그녀는 자세도, 말투도, 눈빛도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우리 모두 진심으로 기뻐했고 축하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현재 상황을 꼬치꼬치 캐물어가며 자신이 상대방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끈질기게 확인하고 싶어 했는데 그 누구에게도 이런 상황이 즐거울 리 없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이들 또한 인생에 큰 역경을 하나씩 넘었다. 한 명은 젊었을 때 모아둔 전재산의 대부분을 통째로 사기를 당했는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와 상관없이 결국 모든 대화는 다시 그때의 충격과 상실, 우울함으로 결론이 나버린다. 그 분노와 허무함을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와 이야기하는 게 유쾌하지 않아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주 '너는 원래 그러잖아' '너답지 않게 왜 그랬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이 또한 편하지 않은 말들이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현재도 그래야 하고 미래도 그럴 것인 나는 진짜 나일까?
다른 사람은 조금 더 드라마틱하다. 다 키워 놓은 그녀의 아들은 수년 전에 스키장에서 경로 이탈 사고로 죽었다. 전재산을 사기당한 상실감도 크겠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참으로 유쾌하다. 그 누구보다 상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고 항상 상대방이 잘 지내는지,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를 늘 똘망똘망한 눈으로 궁금해한다. 그녀의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녀와 거리낌 없이 자기 자식의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그녀의 인간적 성숙함에 조용히 경의를 표할 뿐이다.
생각은 쉽지만 피상적이며 사유는 조금 더딜지라도 깊이가 있다. 내가 만났던 점잖은 사람들은 매일 하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과 걱정 이외에도 별을 관찰하고, 산을 오르고, 악기를 다루고, 책을 읽고, 수천수백 년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탐구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 결국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들과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